[창간특집]1989년에 태어난 한의대생, 1989년에 졸업한 선배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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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1989년에 태어난 한의대생, 1989년에 졸업한 선배를 만나다
  • 승인 2014.07.1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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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호 기자

김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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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 : 임하섭(일산 한사랑한의원 원장), 김청림, 배정한(경희대 한의대 본과 4년)

1989년 7월 ‘민족의학의 미래상 제시’ 등을 기치로 내걸며 창간한 민족의학신문이 어느덧 25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창간특집으로 민족의학신문과 나이가 같은 25세의 한의대생과 25년차 한의사의 만남의 장을 마련했다. 1989년에 태어난 한의대 재학생인 김청림, 배정한(이상 경희대 본과4년)학생이 1989년에 한의대를 졸업한 임하섭(51·경희대 83학번) 일산 한사랑한의원 원장을 찾아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한약분쟁 시절 어땠나" "한의사-한의대생 진정 한마음이었다"

김청림 학생:
말로만 듣던 ‘한약분쟁’을 직접 겪으셨습니다. 당시 분위기가 어땠나요.
◇1989년 당시의 한의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임하섭 원장과 김청림, 배정한 학생(왼쪽부터). <일산=김춘호 기자>

임하섭 원장: 당시 한의대생 뿐 아니라 임상에 있는 한의사들도 모두 단합했습니다. 한의사들은 삭발을 했고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임상의들은 진료를 포기하고 나섰죠.
한약분쟁이 있던 1993년 당시 저는 병원 수련의를 마치고 용산에서 갓 개원한 초보 한의사였습니다. 투쟁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한의사들이 삭발을 한 상태에서 단체로 목욕탕을 갔더니 시민 한명이 조계사로 전화를 걸어 신고를 했어요. 왜 스님들이 낮부터 단체로 목욕을 하냐면서….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고깃집에서 동료들끼리 술을 마시니 스님들이 술도 모자라 왜 고기까지 먹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었죠(웃음). 집에 돌아오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도 아빠의 모습을 보고 울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는 투쟁에 참가하지 않으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기였습니다. 정말 전국의 모든 한의사들과 한의대 학생들이 단합했죠.

"단체 삭발 후 목욕탕 가니 시민이 신고" "한의학관 건립도 이뤄내"

배정한 학생: 전국의 모든 한의사나 한의과대학생들이 모인 대규모 투쟁이었네요, 그런데 투쟁 이후 실제로 한의계에 어떤 변화가 이어졌나요.

임 원장: 투쟁으로 국민들에게 한의학의 현실에 대해 많이 어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가 차츰 지나면서 한의학의 메리트가 조금 더 부각이 됐던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 후 정부 정책이 많이 좋아진 건 없습니다. 한의협도 노력을 했지만 의협이나 약사회가 철옹성이에요.
한약분쟁은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인식시켰다기보다는 한의학이 이렇게 소외됐음을 알렸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 후 한의학 부흥운동을 한 건 없어요. 가장 중요한 거였는데, 정부 정책 담당자들의 마인드가 변하지 않으면 어려운 싸움입니다. 정책을 결정하는 대다수가 약사나 의사가 많다 보니 게임이 안되죠.
투쟁 이후 한방에 대한 인식이 부각됐지만 그 장점을 스스로 살리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부 소아과나 정형외과, 산부인과에서도 침을 놓는 현실이죠. 목욕탕만 가도 부항을 뜨고요. 이것들은 더 이상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건강기능식품이 지금 수십 조 시장이됐고 한방의 좋은 개념들을 대기업들이 빼앗아간 상황이에요.

배정한: 씁쓸하네요.

임 원장: 조금 더 현실에 대해 얘기를 해줄까요? 내가 있는 한의원이 위치한 주엽역 8번 출구에 9층짜리 건물이 있습니다. 거기 한의원이 몇 개나 있을 것 같아요?

김청림: 글쎄요... 3곳 쯤이요?

배정한: 저는 5곳으로 대답해보겠습니다.

임 원장: 9개나 있어요. 옛날에는 개원할 때 옆 건물에 한의원이 들어오지 않았죠. 서로가 미안해서요. 정 안되면 한 블록 떨어지게 하고도 미안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위층에 개원을 한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매너 없이 들어온다고 따지는 게 말이 안 되는 지경이 된 거죠. 요즘 협회에서도 입학정원을 줄인다는 등의 말도 있는데 잘 모르겠네요. 또 하나는 99학번에서 00학번으로 한의대에 입학한 학생들은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였던거 알죠?

배정한: 맞아요, 그때 한의대는 정말 탑 오브 탑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임 원장: 당시 설문에서 10년 뒤 최고 유망직종이 한의사였습니다. 정말로 많은 각광을 받았었죠. 그런데 그 친구들이 졸업할 때가 돼서는 탑이었던 한의사 직종이 유망직종 탑10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들이 사회 나와서 나중에 무슨 고민을 하느냐, 내가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한 게 아닌데 하면서 다시 공부를 하죠.

김청림: 현실에 대해 얘기해주셨는데 후배들이 어느 길로 걸었으면 좋을까요.

임 원장: 제가 정해놓은 답은 간단합니다. 답은 해외진출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것을 10년 전에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똑같이 얘기한 적이 있죠. 당시도 한의계는 과포화 상태였습니다. 개원을 힘들어하고 또 실패하는 모습을 여럿 봐서 잘 알죠. 그때 후배들에게 지구는 넓은데 왜 한국에만 있느냐고 얘기했습니다. 국위선양도 하고 삶의 질도 높아지고 아이들 교육에도 좋아지고 엄청 많은 기회가 있죠.
저는 2004년도에 아이를 뉴질랜드로 유학 보냈습니다. 당시 기러기아빠로 있으면서 시간을 내 아이를 보러 간 적이 있었죠. 뉴질랜드에 도착했는데 해밀턴 한의과대학에서 2시간 정도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당시 해밀턴 한의과대학은 원광대 출신 한의사와 전남대 출신 의사가 한의과대학을 만들었고 20여명의 학생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한의대는 가고 싶은데 실력이 안 돼서 미국이나 뉴질랜드 등으로 간 것이죠. 컬리지도 아닌 인스티튜트(Institute) 개념이에요. 근데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고유의 의학은 대단한 힘입니다. 개원해서 자리 잡는데까지 보통 5년 정도 걸린다고 봤을 때 한국에서 고생하느니 외국에서 고생해봤으면 좋겠어요.
◇1989년에 한의대를 졸업한 임하섭 원장(가운데)과 1989년에 태어난 김청림(왼쪽), 배정한 학생이 인터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배정한: 다시 옛날 얘기로 돌아가서, 저희가 태어나기 전인 1980년대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임 원장: 시위를 참 많이 하던 시기였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한의학관이 따로 없고 의학관을 썼습니다. 9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총장이 엘리베이터도 없앴었죠. 동기 중에 몸이 불편한 친구가 있었는데 점심시간 때면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한 시간을 다 썼죠.
한방병원에서 돈을 많이 벌어주는데 투자는 왜 양방으로 하느냐는 목소리를 많이 냈고 시험까지 거부했습니다. 그때는 양방보다는 한방병원의 매출이 많이 높았죠. 결국 방학을 맞지도 못하고 시험을 봤어요. 그래서 그나마 지금의 한의학관이 생긴 것이죠. 또 사회적인 데모, 학교 데모, 한의학에 대한 데모를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김청림: 아, 한의학관이 없던 시절도 있었네요. 지금은 또 새로 한의학관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선배님께서는 졸업 후에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요.

임 원장: 졸업하고 경희한방병원 침구과에 수련의로 들어갔습니다. 당시는 전문의 자격시험이 없었죠. 한참 지나고 나서 제도가 생겼어요. 당시 수련의 생활은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환자를 케어 했고. 풀베드로 병실환자 50~60명씩 커버하고 그랬던 시절이었죠.

배정한: 그 정도의 환자를 커버하시려면 굉장히 힘드셨겠네요. 선배님의 초보한의사 시절 에피소드를 듣고 싶어요.

임 원장: 1989년에 졸업하고 3년의 수련의 기간을 마쳤습니다. 그 후 1992년에 용산에 있는 한의원에 취직을 했어요. 1년 후에 그 한의원을 인수했고 당시 근처에 모 기업이 있었죠. 어느 날 그 기업의 노조위원장이 만성소화불량으로 치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3군데의 대학병원을 다녀도 이상이 없다고 나왔지만 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하다고 했죠.
약을 처방해줬는데 속이 계속 불편하다고 호소를 했어요. 며칠 후 환자에게 고열이 나고 몸살이 생겼습니다. 그때가 토요일이었어요 기존에 처방한 약은 먹지 말고 열부터 치료해야 해서 새로 처방해줬죠. 주말동안 푹 쉬면서 약을 꼭 달여 먹고 반드시 월요일에 내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이 지나 화요일이 됐는데도 환자는 오지 않았어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전화라도 와야 하는데 그런 상황도 아니었죠.
그런데 수요일에 그 환자의 동생한테 전화가 왔어요. 지금 모 대학병원 응급실에 있다고 했죠. 상황인 즉, 토요일 저녁에 열이 더 심해져서 119를 불러서 대학병원을 갔어요. 병원에서는 한약이 원인이라고 의사가 말했다고 했나봐요. 황당했지만 침착하게 그쪽 병원 의사가 그렇게 말하더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다시 지금 한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약간 움찔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가겠다고 말하며 정말로 한약 때문이면 모든 보상을 하겠다고 했죠.
다음날 점심시간에 입원해 있다는 대학병원으로 찾아 갔죠. 병원에 도착하자 복도에서 환자의 가족들이 나를 둘러싸더니 이 한의사가 내 형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소란을 피더라고요. 자존심이 엄청 상했죠.

김청림: 정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군요, 많이 당황스러우셨겠어요.

임 원장: 일단 보는 사람들도 많으니 계단실로 이동해 담당 의사와 가족들하고 얘기를 했죠. 담당 의사한테 분명히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한약이 원인이냐고, 그러니 담당 의사가 그런 말 한 적도 없고 한약 때문인지 다른 음식 때문인지 모르고 원인불명인 열이라고 하더군요. 한약이 원인이냐고 다시 물었으나 의사는 단정지어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화한 환자의 동생한테 되물었죠.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한 달 정도 지난 후 그 환자가 한의원에 찾아왔습니다. 살이 많이 빠졌더군요.

배정한: 고열로 고생을 해서 그런 것인가요.

임 원장: 열독이 많이 나간 것이에요. 그런데 예전에 약 지어준 것이 남았는데 환불해달라고 하더군요. 환불은 해줬으나, 2주 후에 용산구청의 민원담당 직원이 왔습니다. 그 환자가 서울시장 앞으로 저를 고발한 것이에요. 한약을 먹고 열이 심해져 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그 병원비가 350만원이나 청구돼 그 돈을 보상받겠다는 내용이었어요. 두려울 게 없어 구청 직원들의 말에 따랐죠. 하지만 일주일 뒤에 국무총리 앞으로 고소를 또 했대요.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맞고소를 했습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고발 건으로 구청 직원들이 안 오더군요.

김청림: 좋은 기억속의 환자도 많으실 텐데 한 가지 정도만 더 말해줄 수 있으신가요.

임 원장: 초보 한의사 때는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어요. 1990년대 후반 정도에 한 모녀가 내원했습니다. 아이가 만성위장병을 앓고 있어 꾸준히 진찰하고 침 치료를 했죠. 어느 날부턴가 오지 않아 증상이 호전된 걸로 생각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한의원 옆에 있는 카페 사장이 찾아와 원장님께 치료받는 아줌마가 전달해달라고 했다면서 조용필 CD와 편지를 전달해줬습니다. 편지 내용에는 이탈리아 유학가기 전에 보내는 것이라는 내용이었어요. 아이 엄마가 부부관계가 소원해 나를 만나기 전에는 자살을 생각했었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아이를 치료하고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얻었다고 하네요. 무슨 말에 희망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엄마는 자살한다는 생각을 접고 하고 싶은 것을 하러 떠난다고 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그냥 갈 수 없어서 동기부여가 된 원장님께 카페 사장을 통해 작은 선물을 전달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든 생각 중 하나가 내 행동 하나가 중요하구나, 남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다는 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환자를 대할 때 성의껏 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비한의사에게 조언 해달라” “한의사로서의 정체성 찾아라”

배정한: 본과 4년인 저희한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해주세요.

임 원장: 한의사로 정체성을 찾으세요. 한의학에 대한 근본이론이나 공부를 반드시 해 한의사로서의 자긍심을 가져야합니다. 그게 한의사죠. 정규과정 거치고 국가에서 발급하는 면허를 받는게 다가 아니에요. 돌팔이라고 부르는 침구사들 중에서도 생각보다 실력 우수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과 대적할만한 실력을 쌓아야합니다. 성형 침, 동안 침 등도 있지만 질병을 치료하는 게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환자가 힘들어하는 아픔을 고쳐줘야 해요. 졸업 후에도 계속 한의학 공부를 하세요.

김청림: 25년 전과 지금의 진료환경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임 원장: 스마트폰, TV, 컴퓨터에서 발생되는 전자파 등으로 인한 면역력 약화로 질병이 늘었어요. 25년 전에도 물론 있었지만 빈도수를 비교해보면 훨씬 낮았었죠.
또 음식과 관련된 것도 많습니다. 학생 때 미리 음식에 대한 공부를 해보고 또 스스로 그런 음식을 먹음으로 개선이 되는 걸 느껴야 임상에서 환자에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한의대 6년, 어떻게 보면 머릿속에 넣으려는 지식만 신경쓰다보니 생활 관리는 형편없이 보내는 경우가 많죠. 음식, 생활관리, 잠자리 등 모두 중요합니다. 또 병이 되기 전에 환자에게 얘기해줘서 예방을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어요. 치료를 잘하는 것보다 병이 안 오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배정한: 생활습관이나 음식관리에 대한 지침은 의서에 바탕한 것인가요.

임 원장: 물론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한의학에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 먹는 음식이 있죠. 사상적으로 들어가면 여름에는 더우니 땀을 배출해 속이 냉해져서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체질로 나눠야 합니다. 삼계탕을 한두번 먹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게 반복되어질 때 문제가 일어 날 수 있죠. 환자의 습관을 보고 정리를 해줘야 합니다.

김청림: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원장님께서는 여러 학회활동을 하셨는데 장점은 무엇입니까.

임 원장: 다양한 학회에서 선배들의 임상경험을 듣는 건 아주 중요합니다. 혼자서는 공부가 안 돼요. 기본적으로 이것저것 많이 들어야 하죠. 그러다보면 어느 하나가 끌리고 집중하고 싶은 게 생기죠. 거기에 집중하세요. 그리고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가면 보여요.
<정리=김춘호 기자 what@mj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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