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630] 시골의원의 필독(必讀) 진단학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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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630] 시골의원의 필독(必讀) 진단학 입문서
  • 승인 2014.04.2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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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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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診脈訣」

 

표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종이끈으로 질끈 묶어 맨 모습의 이 책은 의학에 입문하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외우고 익혀야할 내용, 다시 말해 診脈하는 요령을 시귀로 간단하게 정리하여 요약해 놓은 맥결이다. 이 책처럼 본문을 모두 적고 나서 같은 재질의 한지를 손으로 꼬아 종이끈을 만들어서 본문에 구멍을 뚫고 실처럼 꿰매어 묶는 방식을 서지학 용어로 ‘紙捻裝’이라고 부른다.

종이를 여러 겹 겹쳐 발라 만든 두터운 겉표지를 씌우고 붉게 물들인 실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線裝本에 비해 무척 단출하고 다소 취약해 보이는 제책방식이다. 대개 간단한 문서류나 원고뭉치를 묶어 보관하는데 주로 사용하거나 혹은 자신만이 곁에 두고 볼 목적으로 작성하는 노트기능의 기록물에 자주 보인다. 애써 제책방식을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책의 형태를 통해서도 작성자가 이 책을 만든 까닭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제에는 굵은 먹 글씨로 「診脈訣」이라 적혀 있고 오른 편에는 ‘己丑辰月晦日丁亥始謄’이라고 등사 시기가 적혀 있다. 60갑자로 연대를 표기하다보니 아주 오래 된 책에서는 간혹 60년 혹은 120년에 상당하는 긴 세월의 시간차조차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를 흔히 접하게 되지만 종이의 재질이나 서체, 먹빛 등으로 어느 정도 연대를 유추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책의 경우, 대략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도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광복이후에도 물자가 넉넉하지 못하고 전통방식을 고수해 온 시골의 촌로들에 의해 여전히 한지에 墨書로 작성하여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본문은 寸關尺定位, 臟腑定位, 諸脈體狀, 諸脈相類, 諸脈主病, 諸脈相兼主病, 雜病六脈診法, 氣口人迎脈, 總看三部脈法의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후반부에는 부록으로 雜病穴法, 經穴起止 등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눈에 익은 차서에다가 본문의 글들이 익숙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의학입문」에 실려 있는 진맥편의 구절을 베껴 쓴 것이다. 의약을 공부하는 초심자에게 잘 요약되고 정련된 요지만을 제공하는 脈訣歌가 절실하게 필요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래서 오래 전 역사시대에도 王叔和를 비롯해 수많은 의가들이  「맥경」의 정확한 원문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하지만 수백 년을 두고 많은 학자들에 의해 갖가지 맥결이 등장하였지만 결코 原旨를 얻지 못했던 듯하다. 왜냐하면 세간에 「脈訣」이 나돈 이후에 「맥경」의 원문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惡評이 쏟아진 걸 보면, 외우기 간편한 맥결이 거꾸로 그 간이함 때문에 심오한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지적일 것이다.

조선에선 國初부터 「纂圖脈」을 간행하여 醫科考講書로 쓰였지만 제대로 진맥법이 敎授되지 못했던 같고,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허준이 高陽生의 脈訣을 가져다 여러 의가의 주석들을 모두 참작하여 「纂圖方論脈訣集成」을 펴낸 다음에야 비로소 맥법이 정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맥법을 익히는 일은 초심자에게 많은 경험과 지식이 결부되어야 하는 난관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의학에 입문하는 초학자들은 주로 李??의 입문맥결이나 李時珍의 瀕湖脈訣을 선호하였다. 

이 책은 그중 ‘입문맥결’을 위주로 抄寫하여 만든 초학자용 맥결로, 맥학 자가학습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투박한 필치로 입문맥결을 등사한 초사본에 불과하지만, 향학열에 불타는 시골의 의학도들이 정성과 열정을 쏟아 부었을 전통방식의 진단학 입문서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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