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617「南宦博物誌」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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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617「南宦博物誌」①
  • 승인 2014.01.1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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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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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南國의 정취와 風物

새해 들어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니 절로 따뜻한 남녘이 그리워진다. 300여 년 전 내륙과는 다른 남쪽의 이국 풍취가 물씬 나는 제주섬에 부임하여 그곳의 풍물과 여러 가지 의약 사적을 기록한 책이 있어 책속의 인상을 통해 잠시나마 포근한 상상에 젖어보기로 하자.
 

◇남환박물지

이 박물지를 기록한 인물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로 알려진 李衡祥(1653∼1733)이다. 그는 호가 甁窩 혹은 順翁이고 전주 이씨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1680년 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젊어서 호조좌랑을 거쳐 성주목사, 동래부사, 영광군수 등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고 여러 가지 치적을 남겼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해 지역민들이 산에서 기도하던 풍습을 금지시키고, 신당 129개를 모두 불태워 淫祠를 철저히 단속하는 등 제주의 낙후된 풍속을 개혁하였다. 또 이름 높은 선비를 선생으로 모셔 글을 가르치게 하였고 미신적으로 흐르는 불교를 배척해 두 사찰을 불태우고 유교를 권장하였다. 그리고 高乙那, 良乙那, 夫乙那 등 三聖의 사당을 세우고 동성혼인을 금지하였으며, 제주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처럼 목민관으로서 학문을 진흥시키고 미신적인 인습을 타파하여 島民의 풍속 교화와 생활 개선에 힘썼다. 당시 백성들은 그가 떠날 때, 4개의 송덕비를 세워 칭송했다고 한다. 뒤에 경주부윤에 임명되었으며, 1796년 청백리에 올랐다. 저서로는 문집 「병와집」(18권)이 있으며, 이 밖에도 「遯筮錄」·「樂學便考」·「江都志」·「禮學便考」·「성리학대전」 등 수십 권의 저술을 남겼다.

이 책은 그가 51세인 1702년 3월부터 1년 3개월간 제주목사로 재임하면서 남긴 제주도 지방지로 그만 둔 이듬해인 1704년(숙종 30)에 永川의 浩然亭에 머물면서 저술되었다. 영천 역시 한약재의 집산지이고 한방산업의 고장이니 이 또한 인연이 깊다 하겠다. 여하튼 이 책에는 제주도 및 그 주변 도서의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방어 등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으며, 그 분량은 1만3850여자에 달한다고 한다.

이 책의 체제는 晉나라 張華가 찬한 「博物誌」(218회, 오백년만의 還生, 2004년9월20일자, 219회 고대 의학문화 잡학사전, 2004년10월4일자 소개)에 준한 것으로 일반 지리지와는 체재가 다소 다르며, 이 때문에 책명을 ‘박물지’라고 붙인 것으로 보인다.

본문의 구성은 邑號· 路程· 海· 島· 候· 地· 勝 등 37항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을 내용별로 크게 구분하면, 첫 번째 7개항은 제주의 명칭 유래 및 자연환경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6개항은 사적·인물·풍속 등에 관한 것이며, 세 번째 11개항은 제주의 산물과 貢獻 등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 賦役· 祠· 關防· 峰· 倉 등 13개항은 제주의 방어·부역·행정기타를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수록내용에 있어 일반읍지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300여 년 전 제주의 풍속과 물산을 전해주는 지방지로서 내용이 충실할 뿐만 아니라 당시 제주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생활사자료이자 지역사 자료로 가치가 크다. 특히 人戶 · 人口 · 田 · 國馬 · 國牛 등 제주도에 관한 상세한 통계 자료가 들어 있어 제주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도 필자는 당시 육지에서 동떨어져 행정 시혜가 잘 미치지 못하는 섬지역인 제주의 의약과 의료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참고자료로서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一見을 권한다. 저자가 직접 손으로 작성한 手稿本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번역본이 시중에 나와 있으니 쉽게 구해 볼 수 있다. 다음 호에 의약관련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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