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존 인물 백광현의 행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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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존 인물 백광현의 행적 (2)
  • 승인 2013.10.1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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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혜

방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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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위키칼럼 & 메타블로그
방 성 혜
인사랑한의원 원장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저자http://blog.daum.net/shbang98
백광현의 외과술 사례
백광현의 치료 행적을 대표하는 것은 그의 외과술이다. 그가 실제로 행하였던 여러 외과술 중에서 특이할 만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그의 외과술을 대표하는 천(川)자형 절개가 있다. 현종 임금의 어머니이자 대비였던 인선왕후에게 발제종(髮際腫)의 병이 생겼다. 당시 이 발제종의 기세는 매우 맹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사공유사 부경험방」의 기록에 의하면 ‘창양(瘡瘍)의 뿌리가 매우 컸고 사악한 독기의 증후가 나날이 심해졌다. 약간의 죽도 삼키지 못한 것이 수일이 넘었다’고 한다. 죽을 삼키는 것이 힘들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창양이 발제 부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아마도 식도를 압박하여 연하 장애가 생길 정도의 거대한 임파선 종양이 목 부위에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어머니의 병세에 호전이 없자 현종은 백광현으로 하여금 진찰하게 하였다. 이에 백광현은 침을 써서 피부를 절개하여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왕실 사람의 목에 칼을 대어 창양의 뿌리를 절개하는 시술이 행해지게 되었다. 이때 백광현이 인선왕후의 치료를 위해 사용한 침의 종류는 거침(巨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보통의 종기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침이 종침(腫鍼) 임을 감안한다면, 이 거침은 종침보다도 더 큰 크기의 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또한 발제종을 각 4치
◇종침(腫鍼) <사진제공=경희대학교 한의학역사박물관>
(12cm) 길이의 천(川)자형으로 절개하여 그 뿌리를 제거했다고 한다. 옆에서 침술을 지켜보던 현종이 놀라 어수를 들어 침술을 중단시켰으나 백광현은 꿋꿋이 침술을 다 마쳤다. 왕가의 사람에게 칼을 사용하여 치료한 이 사건에서 만약 백광현이 실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참형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혹독한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백광현은 이 침술을 성공시켰다. 또한 그 포상으로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벼슬도 받았다. 이 침술이 워낙에 살 떨리는 시술이었기에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백광현이 ‘오늘 내 수명이 십년은 줄어들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백광현의 이름이 청나라에까지 알려져 국위 선양을 한 사례도 전해지고 있다. 백광현은 식암(息庵) 김석 주(金錫胄)와 함께 사신단에 합류하여 연경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연경에 머무를 당시 청나라의 어느 높은 관리가 사신단 행렬에 백광현이 포함되어 있음을 전해 듣고 찾아와 자신의 어머니에게 생긴 복괴(腹塊)의 병을 치료해 달라 청하였다. 청나라의 이름난 의사들에게 아무리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백광현이 침술을 써서 그 관리의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게 되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연경의 칙사가 한양을 찾았을 때 백광현을 찾아와 청나라 관리가 부탁한 예물과 감사의 말을 대신 전하였다고 한다. 또한 백광현이 치료에 사용하는 침(鍼)까지 신기해하면서 얻어갔다고 한다. 이는 백광현의 이름이 청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청나라 관리의 어머니가 앓았다는 복괴의 병은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어떤 병인지 알기는 힘드나 복부에 생기는 종양의 일종이 아닐까 추측된다.

기생충 질환에도 백광현은 침술을 사용하여 치료하였다. 어느 부인의 우측 하복통을 여러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하자 백광현이 왕진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충(蟲)으로 인한 병이라 진단한 후 종침(腫鍼)으로 복부를 절개하고 곡침(曲鍼)으로 한 마리의 벌레를 꺼내었다. 이 벌레의 길이가 1자(30cm)였다고 한다. 또 한 병사가 넷째 손가락이 계속 아프자 백광현이 이를 진찰하고서 충으로 인한 병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삼릉침으로 환부를 찔러 붉은 색의 벌레 3마리를 꺼내자 통증이 그치게 되었다. 어느 무인의 경우 1년 동안 다리의 통증이 그치지 않았는데 백광현은 이 역시 충으로 인한 병으로 진단하였다. 환자의 환도 혈을 침으로 째고서 벌레 한 마리를 꺼내자 그 길이가 1자 가량이었고 환자의 통증이 바로 그쳤다고 한다. 어느 사람이 여러 해에 걸쳐 치통을 앓다가 결국은 치아가 빠져 버렸다. 치아가 빠졌음에도 통증이 계속되었다. 이에 백광현은 잇몸에 자리한 충으로 인한 것이라 진단한 후 침으로 잇몸을 째고 붉은 색의 벌레 3마리를 꺼내자 이 벌레들이 살아서 꿈틀거렸다고 한다. 환자의 치통은 바로 그쳤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충(蟲)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기생충 질환으로 보이며 이 기생충이 복부, 손가락, 환도 혈, 잇몸 등의 여러 부위를 다니면서 통증을 일으킨 상황에 백광현이 침술로 환부를 절개하여 그 기생충을 적출하여 치료한 것으로 보인다.


백광현의 뜸술 사례
백광현이 워낙에 침술로 알려져 있기에 뜸은 사용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면 이는 섣부른 오해이다. 그는 뜸술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침을 사용하지 않고 뜸을 사용하여 환자를 치료하였다.

◇숙종이 앓았던 제종(臍腫).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사례가 숙종 16년(1690년)에 있었던 제종(臍腫)을 치료한 사건이다. 당시 숙종 임금은 하루하루 배꼽이 부풀어 오르는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배꼽 주변은 딱딱하였고 색깔이 자흑색이었으며 배꼽은 점점 높게 부풀면서 말랑해져서 마치 감이 대롱대롱 매달린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의원 의관들은 모두 배꼽에 종기가 생겨 고름이 찬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오직 백광현 만은 종기로 인한 고름이 아니라 배꼽 아래에서 담수(痰水)가 차있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모든 의관들은 고름이 무르익었으니 당장이라도 침을 써서 환부를 째서 배농(排膿)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백광현은 이에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절대 침을 써서는 안 되고 배꼽의 바로 맞은 편 허리 부위에 뜸을 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숙종은 백광현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고 내의원 의관들의 격렬한 반대를 뿌리쳐가면서 삼일 동안 허리 부위에 뜸을 뜨는 치료를 받았다. 그 결과 배꼽의 오른쪽 부위에 황색의 선이 나타나면서 숙종의 병세는 호전되었다.

숙종의 질환에 대한 내의원 의관들의 진단은 배꼽염(Omphalitis)이라는 것이고 백광현의 진단은 복수(腹水)로 인한 배꼽탈장(Umbilical hernia)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살펴보건대 숙종은 소변이 시원하게 나가지 않고 복부가 멀컹하게 부풀어 오르는 증세를 함께 앓고 있었다(小便澁滯, 腹部虛脹). 이는 복수의 증상과도 일치한다. 결국 백광현의 주장대로 삼일 간 배꼽 맞은편 허리 부위에 뜸을 뜨는 치료를 받으면서 숙종의 배꼽탈장은 치료되었다.

숙종 21년(1695년)에 숙종 임금은 무릎에 수기(水氣)가 있어 무릎이 붓고 아픈 증세가 나날이 심해졌다. 이에 백광현은 복부에 위치한 수도(水道) 혈에 뜸을 뜰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처방대로 수도 혈에 뜸을 뜨자 과연 숙종의 증세는 호전되었고 이로 인해 백광현은 마침내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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