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존 인물 백광현의 행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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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존 인물 백광현의 행적 (1)
  • 승인 2013.10.0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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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혜

방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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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성 혜
인사랑한의원 원장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저자http://blog.daum.net/shbang98
백광현(白光玹)은 인조 3년(1625년)에 태어나 숙종 23년(1697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 실존인물이다. 그는 종기를 외과술로 잘 치료하기로 당대에 이름을 떨쳐 종1품 숭록대부에까지 올랐었다. 그의 자세한 행적은 「임천백씨족보(林川白氏族譜)」와 「지사공유사 부경험방(知事公遺事 附經驗方)」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도 그의 행적이 남겨져 있다. 또한 몇몇 문집에서도 신의(神醫)라는 칭송과 함께 그의 행적이 간략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여러 선조들이 기록으로 남겨서 백광현이라는 이름 석 자를 후세에 꼭 전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그가 펼쳤던 의료 활동이 무척이나 비범했기 때문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도대체 그는 어떤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했기에 이리도 백광현의 이름이 조선 역사의 갈피 곳곳에 남겨져 있는 것일까? 앞으로 3편에 걸쳐 그의 행적과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의사가 된 경위
「임천백씨족보」에 의하면 백광현은 임천 백씨 가문의 31세손이었다. 족보의 내용에 의하면 그의 조상들은 한미한 무관의 벼슬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백광현 역시 처음에는 궁궐 호위 부대인 우림위(羽林衛)에 소속된 군인이었다. 그런데 그만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중상을 입게 되었다. 처음에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는지 그만 폐인이 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유명한 향의(鄕醫)를 집으로 초빙하여 마침내 치료를 받고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무인(武人) 백광현은 의인(醫人) 백광현이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부상을 당하여 절망에 이르렀다가 의사의 치료로 겨우 살아난 경험을 하게 되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무인의 길 대신 의사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유명세를 얻게 된 계기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백광현은 끊임없이 침술을 연마했다. 그가 처음 치료했던 환자는 말이었다. 「완암집(浣巖集)」에 의하면 백광현은 ‘처음에는 말을 잘 고쳤다(初善醫馬)’고 한다. 이런 기록을 통해 그는 말을 치료하는 것에서부터 의료 활동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마의(馬醫)’가 아니라 ‘의마(醫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사복시(司僕寺) 소속의 직업적인 마의였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가 주로 치료했던 환자들은 종기 환자였다. 처음에는 침술이 과격하여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 절름발이 환자를 고쳐주면서 일약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어느 시장 사람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똑바로 걸을 수 없는 지경이 수십 일이 되었는데 백광현이 환도혈에 침술을 행하자 바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절뚝거리던 사람이 똑바로 걸으며 거리를 활보하자 시장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고 이에 백광현 이름 석 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내의원 도제조인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천거에 의해 내의원 침의(鍼醫)로 발탁되어 궁궐 내에서도 의술을 펼치게 되었다.

진단에 능하였다
백광현은 진단에 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20대의 나이였을 때 누이의 시아버지인 박군(朴頵)이란
◇「지사공유사 부경험방(知事公遺事 附經驗方)」(왼쪽)과 「임천백씨족보(林川白氏族譜)」
사람의 폐옹(肺癰)의 병을 진단하였고 자신에게 치료를 맡겨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으나 결국에는 백광현의 진단대로 박군은 폐옹의 병으로 고름을 토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이는 망진과 문진을 통해 폐옹의 병을 진단해낸 것이다.
자신을 내의원 침의로 천거한 백헌 이경석의 손자사위인 신이헌(慎爾憲)을 만난 자리에서는 ‘형색을 살펴보니 폐옹의 병이 들었고 이미 고름이 차 있다’고 말하였다. 이경석과 신이헌이 그의 말을 믿지 않자 맥을 짚은 후에 ‘오늘 밤 반드시 크게 통증이 생길 것이고 만약 며칠이 더 지나면 반드시 치료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냉소를 지었지만 결국 그날 밤 백광현의 말대로 신이헌은 크게 통증이 생겼다고 한다. 이는 망진과 맥진을 통해 폐옹의 병을 진단하고 예후를 예측한 것이다.
숙종 초기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서질녀(庶姪女)가 좌측 복부가 높이 부풀어 오르는 괴이한 병에 걸렸다고 하여 백광현이 왕진을 가게 되었다. 환자의 맥을 짚은 후에 백광현은 ‘이는 임신맥이다. 예부터 말하는 편태(偏胎, 자궁 기형)가 바로 이것이다. 기일을 다 채우면 반드시 남자아이를 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이는 병이 아니라 임신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서질녀는 기일을 채우자 남자아이를 출산하였다. 이 역시 맥진을 통해 임신 여부를 진단하고 태아의 성별까지 감별해낸 것이다.
어느 환자가 오랜 변비로 고생하였고 당대의 유명한 의사들을 초빙하여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 망초나 대황과 같은 사하제를 투여하였으나 모두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백광현이 맥을 짚은 후 말하기를 ‘맥이 화평하므로 병이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없으니 절대로 약을 복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맥진을 통해 망초나 대황과 같은 준렬한 사하제가 적합하지 않음을 진단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백광현이 진단에 능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맥진에 능하였다. 또한 쌍자궁이나 단각 자궁과 같이 발생 과정의 기형으로 인해 자궁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편태(偏胎)를 정확히 진단해낸 것을 보면 그가 인체 구조에 관한 지식도 상당히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약(藥)
백광현이 종기에 외과술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가 침(鍼)만 사용하고 약(藥)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백광현이 주로 침을 사용하여 질병을 고치긴 했으나 약을 사용하여 치료한 사례들도 있다.
먼저 백광현이 사용한 소독비방(消毒祕方)이란 약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백반, 유향, 몰약, 용뇌, 사향, 호동루 등의 약재를 가루 내어 환부에 뿌리는 약이다. 만약 환부가 깊다면 이 약재들을 가루 내어 아교에 반죽하여 가느다란 줄의 형태로 만든 후 환부 깊숙이 삽입하여 사용한다. 그는 이 소독비방이란 약을 일체 악창(惡瘡), 발배(發背), 정창(疔瘡), 연주창(連珠瘡), 뇌후발(腦後發) 등의 질환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승정원일기」에는 백광현이 백화사의 기름으로 만든 사유환(蛇油丸)이란 약을 사용하였다는 후손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위의 변비 환자의 경우에는 죽(粥) 처방을 내렸다. 망초나 대황을 복용할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흰 죽을 끓여 먹되 여기에 비마자(萆麻子) 기름 2~3 숟가락을 타서 먹도록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백광현은 침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약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식치(食治) 처방을 내리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소독비방을 아교에 반죽하여 가느다란 줄 형태로 만들어 깊은 환부에 삽입하는 것은 현대에 주사기를 사용하여 약액을 환부에 투입하는 것과 유사한 치료 행위로 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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