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602 「內醫院先生案」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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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602 「內醫院先生案」②
  • 승인 2013.09.2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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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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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의원의 역사와 의관들의 활약

오늘날 우리가 보는 「내의선생안」은 그 시작은 허준시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현전본에 수록된 내용은 대부분 그 후대에 작성된 것이다. 저술 인물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증 근거가 남아 있다. 현전본의 본문 첫 장에 위 아래로 나란히 날인된 장서인 2과의 印文을 판독해 보면 하나는 [方禹錫印]이라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世範]이란 명문이 들어 있다. 기술직 중인 가계들이 대대로 世傳하는 특성상 이 선생안을 작성하여 소지하고 있었던 주인공은 결국 의관 집안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 「내의원선생안」

 

 


온양 방씨로 의관을 지낸 뛰어난 인물은 단연 方震夔이다. 방진기는 1655년생으로 숙종조 을묘년(1675) 의과에 등재했으니 나이 20세에 조기 등과하였으나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684년에야 내의원에 들어왔다. 아마도 너무 이른 나이여서 오히려 곧바로 서용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이 들어서는 통례원 인의를 지냈고, 경안찰방을 역임했으며, 외직으로는 연천과 과천현감을 지냈다. 특히 품계가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고 벼슬은 지중추부사로 限品을 뛰어넘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또 75세(1729졸)까지 장수하면서 11년간 내의원의 首醫를 지냈다. 그의 후손 가운데서도 줄줄이 내의원 의관이 배출되었다.

특별히 이에 더하여 방진기의 손자인 방태여의 이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방태여는 1705년생으로 경종조 계묘식년(1723) 의과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등과하여 이듬해인 1724년에 곧바로 내의원에 들어왔다. 이후 외직으로 마전과 삭녕군수를 지냈고, 부평과 통진부사를 역임했다. 오랜 내의원 경력과 아울러 1778년 74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역시 품계가 종1품숭록대부에 올랐고 벼슬도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최고의 성예를 누렸다. 특히 13년간 首醫를 지내면서 내의원의 공식기록인 「內醫院誌」 7편을 저술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 집안에서 선생안을 작성하고 보관해 온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실제 기록의 작성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와 같은 정황과 가계의 내력, 그리고 소장인을 근거로 추정해 보았을 때, 이 사본은 온양방씨 의관가계의 현조인 방진기의 유훈을 물려받은 아들 방효민에 의해 방우주가 의과에 입격하고 내의원에 입사하는 시기인 1790년경 처음 기록되었고, 그 후 그의 아들 방우주에 의해 추록하여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순조 갑오과에 등재한 方孝悳은 같은 집안이지만 계파가 다른 인물로 방진기와 동항렬인 방진석의 증손이다. 그는 1748년생으로 갑오년(1774) 식년의과 출신이며, 1805년에 내의원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방태소이고, 조부는 방세범이다. 따라서 이 선생안은 임진왜란 이후 일실된 내의자료를 복원하는 측면에서 다시 작성된 선생안을 조본으로 대대로 추록해 내려오던 것을 方震夔-方世範-方泰素-方孝悳으로 이어지는 온양 방씨 의관 가계에서 작성하여 보관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 가계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세습 의원 집안으로 보이며, 대대로 의과를 거쳐 수의와 내의를 배출한 대표적인 기술직 중인의관 가계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사대부 양반 가문에 비해 족벌의식이나 공경대부를 배출한 가문의식을 내세울 순 없으나 중인계층간의 통혼을 통해 중인가계간의 결속력을 다지고 의과를 통한 기술직 관직의 세습을 꾀함으로써 전문분야의 기술의 전습을 보장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면모는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의 의관들이 배출되는 양상과는 사뭇 대비되는 면모라 할 것이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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