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그런 상황은 이후로도 죽 이어졌다. 급기야 1993년에는 소위 한약분쟁이라는, 그 해 10대 뉴스의 하나를 장식한 거대한 문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이 때는 약대생들도 투쟁 일선에 나오게 되었는데, 유독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1학기말까지 정상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참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왜 한의계에는 저들처럼 묵묵히 학업을 이어가는 학교가 단 한 군데도 없단 말인가!
물론 당시 투쟁 일선에 있었던 학생들 중에는 일종의 정의감 같은 것을 느끼며 싸움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 사회에 원칙이 바로 서야 한다는…. 하지만 결국 그들이 바로잡고자 했던 원칙은 궁극적으로 ‘노력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은 노동 시장에서 지켜져야 할 원칙일 뿐 학문의 세계에서 보장해야 할 원칙은 아니다. 대학은 사회에 노동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다. 대학의 본질적 임무는 학문의 전수와 탐구다. 사실 우리 사회의 초중고 교육에 갖가지 비판의 소리가 쏟아지면서도 아직껏 학생들의 고통이 종결되지 않는 것 역시 ‘노력한 만큼 받아내기’ 위해 학생들이 대학을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선발의 공정성이 어떻고 암기 위주의 교육이 어떻고… 이런 것은 다 지엽적인 문제다. 문제의 본질은 쏟아야 할 노력을 엉뚱한 곳에 쏟아 붓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약계열 대학 졸업은 면허 취득의 필요조건이 되기 때문에 대다수 학생들은 면허를 염두에 두고 입학을 한다. 때문에 졸업 후 직업인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학생 때부터 어느 정도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의대의 상황을 보면 의대나 약대에 비해 훨씬 더 직업적 권리와 관련된 문제에 학생들이 깊이 관여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커다란 피해를 감수했던 것도 사실이고…. 단언컨대, 이는 끊어야 할 나쁜 전통이다.
한의의 명맥이 끊길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한의계에는 다른 직종과는 현격하게 다른 상황의 심각성이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은 한의학을 지속가능한 현대적 학문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의계가 어려울수록 대학은 더더욱 본연의 모습을 잘 지켜가야 한다.
지금 첩약 의료보험 문제로 한의계가 시끄럽다. 현재로서는 내부 의견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라 한의계의 입장 정리가 사태의 본질인 듯 비추어지고 있지만 누군가 한의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면 곧 외부로, 즉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갈 것이다. 그 때가 걱정스럽다.
전국의 11개 한의대는 이제 곧 새 학기를 맞이할 것이다. 학생들이 이권을 지킬 피켓이 아니라 이성을 지킬 등불을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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