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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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승인 2013.08.2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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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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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기 왕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필자가 한의대에 입학했을 때는 아직 군사 정권의 통치가 끝나지 않은 때였다. 이 당시 대학교의 대다수 학생 단체가 활동의 목표로 삼았던 주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였다. 사실 필자는 그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지냈지만, 그런 필자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 하나 있다. 당시 한의대 학생회는 소위 맹인안마사 문제로 학생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대학생 형 누나들은 다들 사상과 이념 문제로 사회적 투쟁에 앞장서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게 한의대의 이런 상황은 괴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대학생들이 남들 침 쓰지 말라고 투쟁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그런 상황은 이후로도 죽 이어졌다. 급기야 1993년에는 소위 한약분쟁이라는, 그 해 10대 뉴스의 하나를 장식한 거대한 문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이 때는 약대생들도 투쟁 일선에 나오게 되었는데, 유독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1학기말까지 정상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참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왜 한의계에는 저들처럼 묵묵히 학업을 이어가는 학교가 단 한 군데도 없단 말인가!

물론 당시 투쟁 일선에 있었던 학생들 중에는 일종의 정의감 같은 것을 느끼며 싸움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 사회에 원칙이 바로 서야 한다는…. 하지만 결국 그들이 바로잡고자 했던 원칙은 궁극적으로 ‘노력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은 노동 시장에서 지켜져야 할 원칙일 뿐 학문의 세계에서 보장해야 할 원칙은 아니다. 대학은 사회에 노동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다. 대학의 본질적 임무는 학문의 전수와 탐구다. 사실 우리 사회의 초중고 교육에 갖가지 비판의 소리가 쏟아지면서도 아직껏 학생들의 고통이 종결되지 않는 것 역시 ‘노력한 만큼 받아내기’ 위해 학생들이 대학을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선발의 공정성이 어떻고 암기 위주의 교육이 어떻고… 이런 것은 다 지엽적인 문제다. 문제의 본질은 쏟아야 할 노력을 엉뚱한 곳에 쏟아 붓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약계열 대학 졸업은 면허 취득의 필요조건이 되기 때문에 대다수 학생들은 면허를 염두에 두고 입학을 한다. 때문에 졸업 후 직업인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학생 때부터 어느 정도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의대의 상황을 보면 의대나 약대에 비해 훨씬 더 직업적 권리와 관련된 문제에 학생들이 깊이 관여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커다란 피해를 감수했던 것도 사실이고…. 단언컨대, 이는 끊어야 할 나쁜 전통이다.

한의의 명맥이 끊길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한의계에는 다른 직종과는 현격하게 다른 상황의 심각성이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은 한의학을 지속가능한 현대적 학문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의계가 어려울수록 대학은 더더욱 본연의 모습을 잘 지켜가야 한다.

지금 첩약 의료보험 문제로 한의계가 시끄럽다. 현재로서는 내부 의견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라 한의계의 입장 정리가 사태의 본질인 듯 비추어지고 있지만 누군가 한의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면 곧 외부로, 즉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갈 것이다. 그 때가 걱정스럽다.

전국의 11개 한의대는 이제 곧 새 학기를 맞이할 것이다. 학생들이 이권을 지킬 피켓이 아니라 이성을 지킬 등불을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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