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598) 「梅亭寶鑑」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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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598) 「梅亭寶鑑」③
  • 승인 2013.08.2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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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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種痘始末과 疫病의 대비

저술시기와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만약 이 책이 서문에 언급한 대로 종두법을 싣고 있다면, 1754년보다 1갑자 뒤인 1814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朴齊家 등이 처음 人痘種法을 燕京으로부터 얻어와 正祖에게 보인 것이 1790년이다.

또한 茶山이 「康熙字典」에서 痘汁을 인체에 직접 접종하는 방법을 읽고 나서 1799년 義州府尹을 지낸 伏菴 李基讓으로부터 水苗法이 적힌 ‘鄭氏種痘方’을 얻어 보고, 이듬해 박제가와 만나 종두에 관한 대담 끝에 「醫宗金鑑」에 나오는 ‘幼科種痘心法’을 얻어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된 종두법이 茶山에 의해 種痘心法으로 정리되는 것은 1800년에 이르러서이다. 따라서 1800년 이전에 남녘에 사는 지방 선비인 한방열이 독자적인 종두신법을 다룬 책을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 「梅亭寶鑑」


또 앞서 노익원이 광주목에서 치러진 과거에 응시하고 求農書綸音에 따라 농서를 지어 올리는 시점도 1798년의 일이다. 그가 40∼50대에 이르러서 이러한 일에 응했다 할지라도 친구인 한방열의 책에 서문을 지어 주기에는 연배 차이가 너무 심하다. 따라서 실제 작성연대는 1754년이 아니라 순조 재위 연간인 1814년으로 보아야 하며, 그래야 노익원의 활동시기와 걸맞게 된다.

왜냐면 서문과 발문에 밝힌 崇禎三甲戌은 숭정제 재위로부터 3번째 돌아온 갑술년이라는 뜻인데, 숭정 재위 연간인 1634년에 갑술년이 들었고 이로부터 추산하자면 1754년(영조 30)이 맞겠으나 明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崇明義理를 고수하여 청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명의 마지막 연호인 崇禎이나 永曆으로부터 몇 번째 갑자인가를 적음으로써 시기를 밝히는 것이 항용 조선 선비들이 사용한 방법이다. 그래서 보통은 숭정후간지로 연차를 밝히곤 하였다. 때문에 여기서 ‘숭정후 3갑술’이라 한 것은 명이 망한 후 3번째로 돌아오는 갑술년으로 풀이하여 1814년으로 비정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또 겉표지에 ‘癸未五月’, 안표지에 ‘黑羊午月 謄書’라 적힌 글귀가 보인다. 서문을 쓴 시기와 연계해 보면 계미년도 1823년으로 보아야 하며, ‘黑羊’은 계미년의 또 다른 표기, 그리고 ‘午月’은 음력 5월을 말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한방열이 수십 년에 걸쳐 겪은 두창과 홍진치료법을 적어 1814년 친구인 노익원의 서문과 자신의 발문을 붙여 책을 펴내고자 하였으나 미처 인행하지 못하였고 9년 뒤인 1823년에 윤은종에 의해 전사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種時紅(種痘, 時痘, 紅疹) 3방을 1책에 같이 쓴 것은 서로 도움이 되는 端緖가 될까 해서이니 혼동해서는 안 되며, 대개 급하고 분주할 때에 찾아보아야만 하는 번거로움을 덜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두창과 홍진 2가지 병증은 불길에 바람이 불어대는 것처럼 처음 발생했을 때 급하게 치료할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만약이라도 적시에 치료하지 못하고 어긋나게 되면 헛고생만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이렇게 논의를 세워 고방에서 모자란 것을 보충하고자 한 것이며, 여기에 소용되는 약품도 역시 지극히 정갈하고 마땅한 것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권말의 痘疹新驗方에는 자신이 가장 효과를 본 것과 創方한 것을 초록해 두고 오래도록 낫지 않은 것을 자세히 분간하여 증치하는 방법에 대해 그 활용법을 적어두었으니 시험해 보라고 말하면서 10여 조문의 치험례와 처방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자신이 제시한 약물들을 평소에 예비해 두었다가 처음 통증이 시작될 때 즉시 사용하길 바란다고 간절히 당부하였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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