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 미병(未病) 연구의 선결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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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 미병(未病) 연구의 선결 과제
  • 승인 2013.06.0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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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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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 왕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필자는 2004년 민간기업의 연구소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필자가 소속되어 있던 부서에서는 그간 진행되어온 연구 과제가 마무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과제 마무리와 함께 향후 과제로서 어떤 것을 추진할지 검토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 때 맡은 일 가운데 전통의학을 이용하여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의 씨앗을 탐색하는 것도 있었는데, 그 때 중국의 여러 문헌을 검토하며 ‘아건강(亞健康)’이란 새로운 단어와 마주하게 되었다. 건강 상태와 질병 상태의 중간적 단계를 의미하는 이 말은, 당시 국내 한의학계에 생소한 단어였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학계의 많은 분들이 이 단어가 지닌 가능성에 깊은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미병(未病)이란 말로 이 개념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아마 많은 이들에게 미병의 영역은 전통의학의 신천지를 약속하는 매력적인 개념이었던 듯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2008년 중국에서는 정부 주도의 ‘치미병건강공정(治未病健康工程)’이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한의학연구원에서 2012년 ‘미병 관리시스템 개발’ 과제가 시작되어 한창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아건강’이란 말의 계보를 따져보면 그 기반이 그리 탄탄하지 못함을 엿볼 수 있다. 아건강 개념은 1980년대 중반 구소련의 학자 버크만(N. Berkman, 문헌에 따라 여러 종류의 다른 철자 표기가 보인다)에 의해 제안되었다고 하나 그는 단지 건강과 질병 사이의 ‘제3상태’를 개략적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며 학계에 미친 영향도 미미했다고 한다. 학술용어로 등재되지 못했을 뿐 비슷한 개념을 이미 많은 사람이 어렴풋하게는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96년 1월 중국의 왕육학(王育學, 청도대학의학원 교수)은 <건강보(健康報)>에 ‘아건강학술토론(亞健康學術探討)’이라는 글을 실어 아건강이란 말을 세상에 선보였다. 1998년에는 아건강의 영문 명칭 ‘sub-healthy state(줄여서 sub-health로 표기)’가 발표되었다. 2002년 왕육학의 저서 「아건강, 21세기건강신개념」이 출간되면서 아건강 개념은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될 때까지도 왕육학은 아건강 개념의 명확한 학술적 정의를 제시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건강 또는 미병 연구가 학회 차원을 넘어 국가적 과제로 추진되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이 문제는 골칫거리다. 문제의 핵심은 아건강 또는 미병 상태가 단일한 상태로 분류될 필연성이 있거나 특정의 치료 수단에 반응하는 공통 특성을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연구가 진행되어봐야겠으나, 수많은 질병에 대해 공통적 본질을 갖는 전구 상태(잠재적 질병 상태)가 존재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 같다.

미병 내지는 아건강 개념이 한의계의 관심을 얻게 된 데는 오늘날 고령화와 생활습관병 증가에 따른 관리 수요가 매우 큰 범위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도 얼마나 큰 시장인가? 그리고 앞으로 계속 성장하는 시장이니! 게다가 현대의학이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고. 이제는 한의계 뿐만 아니라 건강기능식품 공급자나 각종 대체요법 시술자들도 이 분야를 중요한 시장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미병이나 아건강 개념은 ‘상술’이라는 지적이 이미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분명 고령화에 따른 갖가지 문제는 분명히 해결을 요하는 과제들이고, 여기에 미병 연구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무엇인가 해야 한다. 우선은 미병과 관련된 인과적 단위들을 명확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미병이 단일한 인과적 단위가 아니라면 각각의 영역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어떠한 치료적 중재에 반응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미병이 의사과학(사이비과학)이란 오명을 벗을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환자 중심, 의료 소비자 중심의 관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시장이 얼마나 확대될 수 있는가 하는 점보다 미병에 의료적 개입을 할 때 환자가 얻게 되는 비용효과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점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보비대칭을 이용해 의료인의 배타적 권리를 강화하려는 욕심을 이제는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 소비자들도 그 정도는 간파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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