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88) - 「護産廳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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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588) - 「護産廳日記」
  • 승인 2013.06.06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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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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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中의 出産과 求嗣의 법도

조선 왕실에서는 왕비나 빈궁이 懷妊하면 출산을 2∼3달 앞두고 産室廳이 설치되었고 후궁과 제빈의 경우에는 1달 전에 護産廳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출산 후 초이레가 지나면 파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형편에 따라 조금 일찍 설치하거나 조금 늦는 경우도 있었으며, 일률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었다. 정조의 후궁이었던 의빈 성씨의 경우, 1784년에 설치하여 딸을 낳다가 죽게 된 1786년 9월까지 30개월이나 존속되기도 하였다. 산모의 건강과 출산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했음을 볼 수 있다.

 

◇숙종의 후궁 숙의 최씨(훗날 숙빈 최씨)가 영조를 낳을 때의 「호산청일기」

산실청과 호산청은 모두 임시기구였지만 그 위계에 따라 각기 격식과 절차, 그리고 배속된 실무자에 차별이 있었다. 선조 이전에는 후궁은 대궐 밖으로 나가 출산하게 했으며, 내의원의 의관과 의녀, 시녀들을 머무는 곳에 파견하여 출산을 돕도록 하였다. 선조 이후로는 후궁도 궁 안에서 출산하는 것이 허용됨으로써 호산청이 설치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와 관련한 기사를 찾아보면 숙종과 정조대에 각각 2건씩 4건의 기록이 실려 있다.

오늘 소개할 「護産廳日記」는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가 영조를 비롯한 세 아들을 출산한 전후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원본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전하며, 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낸 국역본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어 쉽게 구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 의하면 갓 태어난 아기가 惡水를 몇 차례 토하고 숨이 막히자 金有鉉과 鄭有覺을 급히 불렀다. 두 사람은 모두 내의원의 의관으로 牛黃에 竹瀝을 타서 조금씩 먹이고 또 乳頭에 발라 삼키게 하니 진정되었다. 이때 활약한 의관들은 이레가 지난 뒤 모두 상을 받고 술대접을 받은 뒤 돌아갔다. 영조 임금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니 훗날 영조가 의과시험에 입격한 김유현의 후손을 찾아볼 정도로 특별한 지우를 받았다.

당시 護産醫官은 崔聖任과 全世弘이었으며, 탕약서원은 尹以俊, 裵忠相을 임명하였고 의녀는 仁香과 承禮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때 산모가 복용한 처방을 보면 達生散에 益母草 1돈과 佛手散, 蔘茶, 黃連甘草湯, 密朱, 芎歸湯 등이 투여되었다. 아마도 이 가운데 黃連甘草湯, 密朱는 출산일 당일에 의녀가 가지고 들어간 것으로 보아 신생아를 위해 쓰였을 터이고 산모에게는 특별히 和飯藿湯 즉,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이도록 하였다. 같은 날 배꼽 아래가 당기고 답답한 기색이 있자 나쁜 피가 다 없어지지 않아서라고 판단하고 芎歸湯에 도인, 홍화 각1돈을 넣어 달여 먹였다.

선정전 뒤 태화당에 산실을 배설하고 방위를 정한 다음, 북쪽 벽위에 山圖를 붙였다. 다음은 催生符를 붙이고 借地法, 安産室吉方, 藏胎衣吉方을 붙인 뒤 가막쇠[加莫金]를 박고 馬??(말고삐)를 매달았다. 「동의보감」부인문에 기재된 내용들이 그대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신생아의 洗浴과 洗胎水까지도 길한 시간과 방위를 정하여 시행하였으니 여간한 정성이 아니다.

산모의 세욕을 위해서는 쑥탕이 이용되었고 신생아를 위해서는 매화, 복숭아, 오얏나무 뿌리와 호두 달인 물에 돼지 쓸개 1부를 타서 그 물로 씻겼다. 또 아기가 젖을 자꾸 토하자 전씨백출산에 작약 1돈을 넣어 유모에게 복용토록 하였다. 또 젖을 토하는 아기에게 생강과 모과를 넣어 끓인 차로 안정시켰다. 한편 산모가 심한 변비로 여러 날 고생하자 三仁粥을 食治方으로 潤燥導滯시키는 치법을 구사한다. 무사히 출산을 마치고 호산청을 파할 적에 고생한 의관과 의녀들에게 골고루 하사품이 상으로 주어졌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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