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입자물리학에 길을 묻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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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입자물리학에 길을 묻다 (2)
  • 승인 2013.05.3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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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재

배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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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
수학, 물리학 등 순수과학의 목적이 진리 탐구 그 자체에 있는 것과 달리, 응용과학인 의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건강을 증진하는데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의학을 ‘건강유지와 질병의 예방, 완화, 또는 치료에 관한 업(the prac tice concerned with the maintenance of health and the prevention, alleviation, or cure of disease)’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업을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이론들은 결코 의학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은 의학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시 말해, 약물, 술기, 생활교정 등 환자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수단들이 특정한 효과를 보임을 증명하고, 그 기전을 설명하고, 나아가 새로운 환자와 새로운 질환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일 뿐, 결코 의학의 본질도 정체성도 목적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한의학적 이론 역시 한의학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고정 불변의 명제가 아니라, 환자의 건강 증진이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며, 고로 이 손가락은 달이 일주함에 따라 혹은 나의 위치가 이동함에 따라 각도를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인식의 결여는, 이를 테면 오행설에 대한 피상적 비판 혹은 피상적 옹호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오행설의 반례가 수 없이 관찰되므로 한의학적 치료는 무효하다는 주장이나 혹은 오직 오행설 등 고전 한의학 이론을 지켜야만 한의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임상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과장된 수사를 사용하였지만, 많은 논쟁들이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양 극단의 주장 두 개를 앞서 제시한 입자물리의 사례에 대입해보면 이들 주장이 범하고 있는 오류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전자의 주장을 살펴보자. 러더포드의 산란 실험에 의해 톰슨의 푸딩 모형은 파기되었지만, 톰슨의 이론이 부정된다고 그가 발견한 전자의 존재마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합곡혈의 소화불량 완화 효능을 다시 꺼내보자. 물론 언젠가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론이 틀린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오수혈론을 파기하고, 고전경락이론을 버리고, 합곡이라는 경혈명마저 지울 수 있다.

하지만 해당 해부학적 위치에 dry needle로 자극을 가하면 여전히 소화불량은 개선될 것이고, 고로 해당 위치에 침을 시술하는 것 또한 여전히 임상적 가치가 있을 것이다. 고전 한의학 이론의 한계와 한의 치료의 임상적 효능은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문제다. 애시당초 임상적 효능이 먼저 있었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중에 고안된 것이 한의학 이론인데, 이 이론의 약점으로 효능 자체를 부인하려는 시도는 어불성설이다.

전자의 주장과 같은 공격을 너무 많이 받아온 탓일까? 고전 한의학 이론을 고수하는 것이 한의학이 살아남을 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볼 수 있다. 입자물리학으로 다시 눈을 돌려보자. 러더포드 산란 실험의 결과 앞에서 “톰슨의 푸딩 모형을 원형 그대로 지켜야만 전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입자물리학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는 당대에도 현대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톰슨 푸딩 모형의 보존과 계승이 아니라, 소립자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이를 활용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응용 과학인 한의학은 어떻겠는가. 한의학이 살아남기 위한 관건은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고전 한의학 이론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합리적이고, 증명과 반박이 가능하며,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진보된 한의학을 만들어 인류 보건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에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침과 한약의 효능과 작용 기전을 음양오행 등이 아닌 현대과학을 통해 설명할 경우 그것은 더 이상 한의학이 아니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마찬가지의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애시당초 한의학 이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음양론, 삼음삼양론, 오행론, 기미론, 화열론, 비위론 등 당대의 가장 발달한 과학과 철학을 이용하여 도구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변천해왔으며, 현대 과학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인류가 가진 최선의 지식과 지혜로 한의 치료의 효과를 검증하고, 기전을 설명하고, 더욱 나은 치료법을 모색하는 학문이 ‘현대 한의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지금까지 예로 든 주장 모두가 한 가지 오류를 공통적으로 범하고 있다. 한의학 이론을 한의학적 치료의 기전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고로 효용성을 상실하였을 때 수정보완 혹은 폐기할 수 있는 도구)로 분리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한의학의 이데아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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