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81) - 「經驗醫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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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581) - 「經驗醫訣」
  • 승인 2013.04.1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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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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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깨우치는 杏坡居士 醫門捷訣

표지에 ‘一見能解 經驗醫訣’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작은 책자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간행된 것이다. 서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곡식으로 굶주림을 구할 수 있고 약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으니,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이어 이 책에 대해 소개하길 “의학을 학습하는 이에게 근간에 나온 ‘醫學見能’이라는 책은 문사는 간략하되 이치가 명료하여 미처 깨치지 못한 사람도 한눈에 손금을 보듯 처방을 찾아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 「경험의결」

하지만 서문에 근래 事變(1931년 만주사변과 1935년 중일전쟁 이후의 상황을 말하는 듯)이 터진 후론 구할 길이 막혀 널리 구해보기 어려워 할 수 없이 원문에 현토하여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이 과정에서 원서명 아래 ‘경험의결’이라는 4자를 덧붙인 것은 실제 처방마다 반드시 경험한 것을 채록한 까닭이요, 私利를 채우고 표절하려는 뜻이 결코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서문의 작성 시기는 1940년 9월(‘庚辰菊秋’)이며, ‘서울 杏林書院 樓上에서 ?刻者 杏坡識’라고 적혀 있으니 행림서원 李泰浩가 중국 원서를 들여와 구결을 붙이고 재편해서 발행한 것이 분명하다.

그간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다수의 의학서적에서 ‘杏坡’ 혹은 ‘杏坡居士’라고만 밝혀져 있는 경우가 많아 다수의 독자들이 이 필명의 장본인이 누군가에 대해 궁금하게 여겨왔던 터였다. 위의 글귀와 권미의 판권부의 ‘著者兼發行者’로 이태호의 이름이 적힌 것으로 보아 杏坡가 바로 행림서원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한의문헌을 수집하여 책으로 엮어낸 이태호라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다. 그는 1923년 행림서원을 창립한 이후 일제강압통치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포화에 사라질 뻔 했던 수많은 한의서를 구해 다시 볼 수 있게 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다.

원작은 청말 의학자인 唐宗海(1862~1918)가 지은 「醫學一見能」이라는 책이다. 1890년(광서16)에 쓴 저자의 原序가 붙어 있고 秦伯未가 1924년에 지은 서와 1934년에 작성한 校記가 들어 있다. 본문에는 중간 구절마다 한글로 된 구결을 달아 읽기에 편리하다. 범례 4번째 조문을 보니 “是書는 原無歌括하야 苦於難記일새 今按各節衍成絶句하야 以便記誦하니 眞醫門中第一捷訣也리라”하였다. 이로보아 이 책의 歌訣은 唐容川이 한 것이 아니며, 후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은 5부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권1에 診法, 권2와 3에 證治, 권4에는 婦科, 兒科, 外科, 권5는 부록으로 救急各方이 실려 있다. 전체가 외우기 좋게 요약해서 대귀형태의 단문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증치부에서는 總訣, 藥方, 歌括 등으로 요령 있게 정리해 놓아 한눈에 요지를 파악할 수 있고 학습에 편리하다. 내용은 대개 장부경락, 사진법으로 시작해 44종의 상습질환에 대한 증치방법을 다루고 있다.

이태호가 한 일 또한 적지 않은데, 현토와 가결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서문에서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 전문에 걸쳐 欄上 여백에 어려운 글귀나 내용상 난해한 곳에 대해 해설을 덧붙여 놓았다.

또 秦伯未의 按語에 대해서도 일일이 한글토를 붙여놓아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이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에야 이런 방식마저도 거의 한문으로 쓰인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겠지만 대부분의 식자층들이 한글보단 오히려 한문에 더 익숙했던 당시 정황을 감안한다면 매우 친절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정부수립 이전까지 한의사제도가 수립되고 현대식 한의학교육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출판되었던 대다수의 한의서와 간행물들이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 역시 이 시대를 표상하는 한의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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