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3] 召松 申佶求 선생(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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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3] 召松 申佶求 선생(下)
  • 승인 2003.06.2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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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저 신씨본초학 총론·각론 집필


선생은 1920년에서 29년 사이 청강 김영훈 선생 문하에서 한의학과 본초학을 사사하고 동시에 본초강목을 완역할 정도로 이론에는 밝았지만 실물을 보아야 하였기에 늘 기회를 만들어서 각 지방 산야를 누비며 약초채집을 다녔다. 이때 채집다닐 때마다 큰딸을 데리고 다녔다. 같이 다니면서 이 식물은 이름이 무엇이며 약명은 무엇이고(예, 우리말로 삽주, 일어 オケラ, 창출, 뿌리), 양건하는지 음건하는지, 삶아서 말리는지 쪄서 말리는지 술에 담구어 말려 쓰는지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10本이상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지, 그곳이 양지인지 평지인지, 음지(습지)인지를 살피고 그 상황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아무리 군락을 이루고 많이 있어도 2~3개 이상은 채집 못하게 하고 희귀한 경우는 한 개이상은 뽑지 말고 후진을 위해 또는 내년 번식을 위해 꼭 남겨두는 것이 학자로서의 양심이며 책임이라고도 가르쳤다.

◆ 약재 상황 카메라에 담아

서울 근교의 산은 말할 것도 없고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함북 회령에서 전남 해남까지 8도를 두루 다녔다. 등산가가 아니어서 정상까지 올라가지는 않았어도 밑에서 중턱까지 일년생 초본에서 다년생 목본에 이르기까지 뿌리, 열매, 적은 가지 잎사귀 등 胴亂(채집통)에 형태가 구겨지지 않게 담아서 짊어지고 다녔다. 서울근교는 돈암동 종점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서쪽으로 성벽을 끼고 돌아 삼각산 인왕산 안산을 거쳐 영천으로 내려왔다.

지금은 시가지나 주택가로 되었지만 진관사 문수암으로 나와 그곳 스님과 한담도 나누고 이웃주민과 약초재배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집에 돌아오면 중국서적이나 일본의 유명식물학자인 朝比奈 박사의 저서 또는 식물도감 등을 펴놓고 연구정리하기에 바빴다. 북쪽 고산식물과 남쪽의 아열대식물에 이르기까지 식물학자 장형두 박사와 동행한 일도 많았다.

◆ 채집 후 일일이 정리

선생은 이렇듯 채집여행 재배강습여행을 다니면서 방언채집도 했다. 제주도에 가서는 그곳 방언이 경상도나 전라도보다도 유난히 다르니까 방언채집을 해서 제주도방언집을 만들기도 했다. 이와같이 어문학에 관심을 보이는 한편 명승고적을 찾으면 그곳의 유래, 발견년대, 그리고 전래설화도 기록으로 남겼다. 속리산기행, 동룡굴(평북 구장군) 답사 등 그 자세함과 친절한 설명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채집다니며 방언을 채집하거나 사찰에서 스님들과 혹은 그곳 지방주민들과 나누는 대화가 모두 약초의 재배와 수확·조제·저장에 이르기까지 현장학습이었다.

약국을 찾는 환자가 있어도 환자의 상태, 평상시의 식생활, 생리현상 등 문진과 진맥으로 체질을 감안, 아무리 만성병이라도 다섯첩 이상은 안지어주고 복용하고난 후 다시 용태를 봐서 더 투약하는 등 영리보다는 학자적 양심으로 대했다.

선생은 대학에서 강의하는 중에도 한약협회 일을 하기도 했다. 한약협회 서울지부 부회장을 맡았던 이력은 서울대 약대 교수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본래 한약업사로서 출발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다는 의지의 표시로 읽힌다.

1972년 별세하기 전까지 선생은 저작활동에 몰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씨본초학각론의 출간사를 썼던 수문사 姜壽炳 사장에 의하면 “1965년 본사로부터 집필의뢰를 받고 손을 대기 시작한 지 7년만인 1972년 비로소 탈고를 해 출판이 시작되었으나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해설하에 정확한 처방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다듬느라 총론편과 동시에 출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동서의학연구회장으로 있던 의학박사 이종규씨도 선생의 연구열을 극찬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경에 그 정력이란 도저히 젊은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항간에서 말하는 본초학의 귀신이다. 이미 고희의 연세를 넘기신 선생으로서… 과학적으로 조리있게 풀이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정작 선생은 본초학은 ‘1+1=×’라는 식의 과학이 아니라고 밝혔다. 오히려 본초학은 형이상학이며,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신조로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구에 표현된 바 眞相을 파악하는 한편 배후에 존재하는 實相을 사색해야 한다는 게 선생의 지론이었다.

◆ “본초학은 과학 아닌 형이상학”

선생은 1972년 7월 11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장녀 신현경 씨는 선생의 영면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노년에는 후진양성교육에 거리의 원근을 가리지 않고 강연여행을 다녔어요. 돌아가시기 전에도 청주지방에 강연하러 갔다 귀경해서 기행문을 쓰다가 잠자리에 든 뒤 그대로 영면으로 이어졌습니다.”

선생은 한의학의 과학화를 위해서 장녀를 경성약전에 진학케 했다. 장녀 신현경 씨는 “현실에 타협하다보니 선친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고희를 넘겨 후회막급이고 그 불효가 하늘을 찌를 듯 송구하기 그지없다”고 회고했다.

선생의 1남3녀 중에는 의약분야로 진출한 자제와 손자들이 많다. 장녀 신현경 씨와 삼녀 신창휴(재미) 씨, 손녀 신재우 씨는 약사이며, 선생의 장손자인 신동우 씨와 둘째 사위는 양의사, 차손자인 신승우(32) 씨는 한의사로서 현재 경희대 강남한방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으로 근무, 한 대 걸러 한의학의 맥을 잇고 있다.

문하생에는 서울시한의사회 회장을 역임했던 故 임덕성 씨가 있다.

가족들은 지난해 7월 9일 30주기 추모예배를 갖고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렸다.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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