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역사의 산물인가 보편의 학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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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역사의 산물인가 보편의 학문인가
  • 승인 2013.02.2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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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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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왕 부산대 한의전 교수
이제는 좀 수그러든 느낌이지만, 얼마 전까지 한의학의 영문 명칭을 놓고 이런 저런 말이 많았다. 근래 수십 년간의 흐름을 살펴보면, 전통의학 교육에서 중의학의 영향력이 점진적으로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각국에서 사용하는 전통의학의 명칭은 오히려 국가색이 짙은 명칭으로 바뀌어갔음을 알 수 있다.
한의학(漢醫學)에서 한의학(韓醫學)으로, 동양의학(Oriental Medicine)에서 한국의학(Korean Medicine)으로…. 북한이나 베트남 그리고 일본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보인다. 명칭을 놓고 이런 저런 논란이 있었던 데에는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의학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한의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다들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두를 만족하는 정의를 하자면 역사를 기준으로 한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기원하여 우리나라에서 발전해 온 의학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한의학은 역사적 연원을 배제하고 그 내용을 통해서 규정될 수는 없는 학문인가?
한의학의 정체성은 오늘날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위기 상황과도 관계가 깊다. 요즘, 한의계의 형편이 어렵다 한다. 그 원인으로 흔히 지목되는 것은 한의사의 증가, 건강기능식품 시장의 팽창, 한약재의 안전성에 대한 대중 인식의 변화, 한약 제형의 후진성, 현대적 수준의 근거 제시 미흡 등등이지만 과연 이런 문제가 해결되면 한의계의 앞날은 장밋빛으로 바뀔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주위 개원가에서는 다들 이제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고 하지만 선배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일찍이 70년대에도 후배들 세대에 한의학이 살아남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고 한다. 한의학의 생존 문제는 왜 이토록 오래도록 모두의 근심거리가 되어왔을까? 여기에는 단순히 현실 경험에서 비롯되는 위기감 이상의 무엇이 있다. 한의학이 과연 지속적인 창조를 이어갈 독자적 영역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귀납적 우려가 아닌 연역적 우려가 근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원리를 기준으로 한의학을 규정하면 결국 도그마에 도달하기 쉽다. 도그마에 기반한 지식체계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반면 도구를 기준으로 한의학을 규정하면 한의학은 너무 좁은 곳에 갇히게 될 뿐 아니라 아예 학문이 아닌 단순 기술 체계로 전락하기 쉽다. 도그마에 발을 딛지 않으면서 현대의학으로 환원되지 않을 한의학만의 고유한 영역은 없을까.
한의학이 소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흔히 ‘한의학, 양의학이 어디 있는가? 그냥 의학이다. 양수학, 양물리학도 따로 있다고 할 텐가’라고 항변한다. 이 분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거 유럽과 동아시아의 수학, 물리학이 따로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방법이 달랐고 탐구의 대상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의학도 이렇게 사라지고 말 운명일까?
나는 여전히 인류의 보편적 지적 영역으로서 한의학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질문보다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혼합물의 최적 이용 방법은 무엇인가, 비특이증상들은 어떤 패턴으로 함께 나타나며, 이를 어떻게 분류하고 이용할 것인가,  통증이 연상되는 물리적 자극의 종류와 위치에 대해 생체는 어떤 반응을 하는가 등등의, 역사적 연원 내지는 지역적 배경과 무관한 인류 보편의 질문에 대해 한의학은 답을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미래에는 이러한 질문에 현대의학이 최선의 답을 던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연역적으로 미리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희망하건대 세계각지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보완대체의학의 실험들이, 한의학이 현대 인류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져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탐구 과제들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분명한 것은 이제 역사적 산물로서의 한의학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학문으로서 한의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최소한의 논의가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김 기 왕
부산대 한의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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