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3] 召松 申佶求 선생(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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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3] 召松 申佶求 선생(上)
  • 승인 2003.06.2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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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본초학 정립한 ‘한국의 신농’
본초강목 탐독하다 한의학에 입문


신길구(1894~1972) 선생은 서울한의과대학과 동양의약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본초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세인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한의학계의 학자로서 일제시대부터 이미 일인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고 추대되어 모든 한의학연구소 또는 황한의생강습소의 강사로서 강의를 도맡아온 선생은 본래 한의학자는 아니었다. 원래 선생은 사립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수료한 뒤 判任 文官試驗에 합격했다.

3.1운동 후 무인독재자 테라우찌(寺內)가 물러가고 사이또미노루(齋藤實)가 총독이 되어 소위 문화정책을 펴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자 선생은 동아일보 창간 기자가 됐다.

그러나 검열과 폐간이 빈번한 와중에서 선생은 졸지에 실직자가 되었다. 그때 삼남매가 3세, 4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자 비탄에 빠져 근 10년을 허송하게 되었다.

이때 의학에 관심을 두고 심심 소일로 李時珍의 본초강목을 탐독하고 번역을 하게 됐는데 이것이 곧 선생이 한의학에 입문한 시초다.

선친이 한학자인데다가 서당에서 한학을 이수한 경력은 본초강목을 완역하는 기틀이 됐다. 정통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선생은 본초강목 이외에도 의학입문, 동의보감을 문헌을 통해 배웠다.

선생의 특이한 이력 중에는 朝鮮 漢藥業組合 월보 주간을 맡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약업사가 되기 전의 일이다.

한약업조합은 한약재의 수출과 수입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국내외의 다양한 한약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한문해독능력과 한약업조합에서의 경험으로 선생은 총독부가 시행한 한약업사시험에 응시하여 제1호로 합격했다. 1931년에는 한약국을 개업해 한의학의 임상에 들어가게 됐다.

해방 전에 이미 선생은 본초학의 달인이 되어 경기도 의생강습소 강사로서 본초학을 강의하는가 하면 동양의학강습소 강사를 역임하면서 한의학 제도가 없는 일제시대 한의학의 명맥을 잇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다.

해방 후에는 동양대학관 교수를 역임하고 1952년 한의사국가고시 위원, 1953년 서울한의대대학이 만들어졌을 때(당시 학장 박호풍)에는 교무처장으로서 초기 한의대 교육의 틀을 빚는데 이바지했다.

선생은 한의대 교수로서 서울대 약대 강사를 맡았다. 한의학계 인사로서 서울대에서 강의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원전 해독능력과 산야를 누비고 다닌 채집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의 강의에 힘입어 서울대 약대에 본초학이 이식될 수 있었다.

이 이후에도 선생은 한의과대학에 강의를 나갔다. 1961년에는 동양의대 교수로 있었으나 학내문제에 얽혀 그만두었다가 1965년 경희대와 동양의대가 합병하면서 다시 본초학 강의를 맡았다. 선생이 작고한 뒤에는 고 안병국 선생이 ‘신농본초 100종’이란 책으로 강의를 이어받았다.

선생에게서 본초학을 사사받았던 이상인(경희대 한의대 명예교수. 현 서울 수유리 이상인한의원) 전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본초집요 상하권으로 교육을 받았지요. 1권은 목본과 초본이었고, 2권은 광물과 동물을 다룬 책입니다. 이들 책은 1년내로 끝마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강의는 매번 30~40분 늦게 끝났는데 말입니다. 하여간 본초의 세계가 무궁무진했어요.”

이런 선생이 본초학분야에서는 어떤 공헌을 했을까? 단순히 가르친 것 자체도 한의학계에 공헌이라면 공헌이지만 그것만으로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뭘까? 이상인 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선생의 본초학은 동의보감 식으로 기원, 성상, 기미, 귀경, 효능, 주치 등을 조목조목 기술했어요. 이를테면 당귀는 ‘산형과에 속한 … 뿌리’라고 가르쳤어요. 그러나 학명은 넣지 않았어요. 한약재를 식물분류학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선생의 기술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학명이 있었으면 더 정확했을 것입니다.”

같은 당귀라도 안젤리카 기가스와 안젤리카 시넨시스, 안젤리카 아큐블로라로 나눠지고 후자 2가지만 유효한 게 지금의 본초개념임에 비추어 다소 미흡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학문이 발전한 현재 시점에서 본 한계일뿐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선구적인 측면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한의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당시 우리나라 현실에서 본초학의 체계를 확립한 성과는 세월이 흘러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게 현직 본초학 교수들의 판단이다. 강병수(동국대 한의대 본초학) 교수는 그를 ‘최근세 본초학의 대부’, ‘한국의 신농’이라고 부를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당시 발행된 모잡지에는 선생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생약연구의 메시아격인 인물로서는 동양의약대학 교수이신 신 선생을 (한의계의 ‘베테랑’ 컬럼난에) 모시지 않을 수 없다. 40여년간 오직 선조들이 이룩한 경험약을 과학적인 체계로 정리하신 공로는 치하하기기에는 너무나 크다. 지금 71세의 고령임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연구에 몰두하실 뿐만 아니라 후배지도에도 세심한 주의를 아끼시지 않으신다.”

이런 스승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본초학과 본초학을 연구하는 후학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국의 산야를 누비면서 연구·개발·정리하기 40여년.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적 가치는 여러 권의 책속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본초학 총론(1954년), 본초학 각론(1958년), 한방의학 집요(1963년), 동의개론(1966년), 약초재배법(1969년), 중요한방처방집(1971년), 신씨 본초학 총론(1972년), 신씨 본초학 각론(유고. 1973년 출간) 등이 있다.

대부분 강의록을 정리한 책들이다. 본초학자들은 이들 책이 지금도 깊이가 있다는 평을 아끼지 않는다. <계속>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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