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위키칼럼 & 메타블로그 - 2000억, 난임, 조건부 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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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위키칼럼 & 메타블로그 - 2000억, 난임, 조건부 급여
  • 승인 2012.12.1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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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태

임정태

julcho@naver.com


 

필명 : 이제마뛰어넘기
소개 : 근거중심한의학을 통한 역동적 복지국가를 꿈꾸는 한방내과전문의
블로그 주소 : blog.naver.com/julcho 

첩약 2000억 급여화 방안이 발표되었을 때 다들 한조시약사와 같이 한다는 것에 격분했지만, 약사문제 보다도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년 시한의 급여라면 결국 3년 후에는 사업의 성과를 평가하고 그에 따라 지속적으로 급여를 재개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입니다.

정부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3년 후에 첩약사업 재개 여부를 결정할까요? 복지부에서 이 사업에 조건부 급여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다면, 약사를 배제하고 의약분업도 안하고 한의사만의 사업이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독이 든 사과일 수 있습니다. 결국 객관적인 데이터로 사업 지속여부를 결정할텐데, 질환군을 특정하지 않고 처음 알려졌던 방식대로 노인·여성층에 보름치씩 한약을 ‘뿌리면’ 과연 의학적·경제적 효과가 있었다는 데이터가 나올 수 있을까요?

첩약사업이 보도된 직후 분업, 약사문제에 대한 논의가 격렬해져서 어떻게 객관적으로 성과를 평가하고 데이터를 축적할지에 대한 논의는 잘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설령 데이터가 수집되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면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 한약의 급여화는 더욱 어려워 질 것입니다.

외국의 급여결정 과정

근거 수준이 높은 경우에는 급여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에 쟁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의약치료처럼 아직 근거가 부족하나 이득의 잠재력은 보이고, 향후 임상연구의 재원이 불분명하여 임상시험이 진행될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 엄격한 잣대로 수용을 금지하게 되면 후속 환자들은 양질의 진료를 받을 기회를 잃게 되고 의학의 발전을 침해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반대로 근거가 부족한데 급여화를 한 경우에는 향후 이에 대한 임상시험을 수행하려 해도 그 치료법이 한의계의 표준치료법으로 굳어진 상태라면, 그 치료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조군을 설정한 엄격한 임상시험을 수행하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효과가 없는 치료법이 지속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근거중심보건의료」 p.233-4). 그렇다면, 잠재적 가치는 있으나 현존하는 근거가 불확실한 치료법에 대해서 외국에서는 어떻게 급여여부를 결정할까요?

기존 치료법이 만족스럽지 못한 난치병은 연구능력이 있는 의료기관에 한해 임상연구를 통해 근거자료를 추가로 작성해 보고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해당 의료행위를 한시적으로 허용하고 일정기간 후 근거자료를 재평가해서 급여인정 여부를 최종결정 합니다. 이것을 근거생산 조건부 급여제도(Coverage with evidence development, CED)dl라고 합니다(청년의사 621호). 따라서 임상시험에 참여한 환자군만을 대상으로 급여를 하거나 급여 중인 약제의 실제 효과를 증명하는 추가적인 임상시험 수행을 조건으로 급여를 승인합니다.

또는 조건부 치료지속(Conditional Treatment continuation, CTC)이라고 해서 치료목적을 달성한 환자에 한해 해당 약물의 보험급여를 연장시켜 주는 방법이 있는데 치료제가 충분한 효과가 없는 환자에게까지 급여가 되는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청년의사 635호).

존슨 앤 존슨의 다발성 골수종 항암제 ‘벨케이드’는 특정한 생체지표로 진단되는 ‘일부’의 다발성 골수종 환자에 한해서만 급여를 해주고 약효가 없을 때는 치료비 전액을 해당국가의 보건부에 상환하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파괴적 의료혁신」 p.15)

엄격한 근거중심급여표준을 적용할 때 ‘새로운’ 의료가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어려움을 초래하므로 임상시험과 연계하여 일정기간 급여하는 방식의 좋은 예로 미국에서 시행된 국가 폐기종치료임상시험이 있습니다.

메디케어와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7년에 걸쳐 폐기종환자 1천218명의 폐재활치료와 폐용적감소수술의 RCT를 수행했습니다. 메디케어는 임상시험 기준에 합당한 환자들에 대해 급여를 해주었고, 연구결과 어떤 부류의 환자들에게서는 삶의 질과 생명연장의 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생명연장의 유익을 보인 군의 특성에 해당하는 환자들의 조건에 한정해서 급여기준을 개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환자들은 불필요한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고, 의료인은 예후가 좋은 환자에게만 수술할 수 있었으며, 정책 결정자들은 의료비를 합리적으로 사용할 근거를 마련해서 모두가 이득을 봤던 셈입니다(근거중심보건의료 p.236-7).

특정질환군에 집중한 시범사업의 효과

비대위의 결정이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지금의 첩약급여정책이 전면 폐기되고 앞으로 한의계에 치료용 한약의 보험급여를 위한 재정이 다시 책정된다면, 지금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며칠분 이런 방식이 아니라 특정질환군으로 범위를 좁혀서 사용해야 합니다. 위에 언급한 폐기종 모델을 적용하기에 좋은 질환 중 하나는 난임사업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심평원, 보건복지부와 협약을 맺고 임상시험 기준을 만족하는 난임부부에게 첩약의 조건부 급여를 허용하고 임신/출산 데이터를 축적합니다. 임신/출산은 플라시보효과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지표이고, 결과 해석에 논란의 여지가 적습니다. 구조적 이상 여부, 인공수정 실패 여부 등에 따라 출산성공률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은데, 사업결과를 바탕으로 한의약치료가 효과적인 군과 그렇지 않은 군을 선별하고 효과적인 군에 보험급여를 지급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2천억은 한약 재료비뿐만 아니라 거점 대학병원 부인과/난임전문한의원의 진단과 치료, 평가를 위한 시설을 구축하는 데에도 같이 쓰여야 합니다.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한 전자차트 구축비, 공통된 평가기준과 치료방식 공유를 위한 임상의사 교육비용, 객관적 진단을 위한 거점 센터 구축과 진단기기 설치 등(연구목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초음파를 쓸 수 있습니다. 환자의 Inclusion & Exclusion criteria를 설정하고 향후 한의약치료가 더 효과적인 군을 구분해내기 위해서도 진단기기 활용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2천억 원이 쓰일 곳이 난임사업만 해도 많기 때문에 많은 질환에 나눠서 찔끔찔끔 쓸 돈이 아닙니다.

이런 방식이 지속되면 3년마다 한 질환군에 대한 근거가 지속적으로 창출될 것입니다. 30년만 지나면 주요상병에 대한 한의약치료의 근거가 많이 확립될 것이고, 환자와 의료인 입장에서도 어느 환자군이 한의약치료에 적합한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득입니다. 결과가 좋다면 정부에서는 더 많은 사업을 시행하고자 할 것입니다.

일부 의료계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치료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근거가 불명확하니 그에 대해 근거를 찾아보고 치료효과가 적은 환자군에 대해 공표하고 보험급여를 안 받겠다는데 그에 반발하는 것은 명분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해외에서는 침과 한약의 난임에 대한 Systematic review가 발표되었으며(Fertility and Sterility 2012, Com plementary Therapies in Medicine 2011), 동국대학교 부인과 김동일 교수님 연구팀에 의해 한국인에서의 예비연구도 이뤄진 상태이기 때문에 사업을 시행할 학문적 근거는 충분하다고 보입니다.

한의계 스스로 현실적·구체적 안 제시 필요

복지부나 심평원 등에서는 앞으로 늘어날 의료비 부담을 근거기반의 급여를 통해 조절하려고 할 것입니다. 한의계에서 3년짜리 첩약급여사업을 하고 근거를 창출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앞으로 제제/첩약의 급여화를 시도하는 것이 더 힘들어 질 것이므로 지금의 접근방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약과 관련해서 보험의 우선순위는 첩약이 아니라 제제라고 생각되지만, 이 부분은 이견이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첩약에 대한 보험급여 문제는 결국 언젠가는 다루게 될 사안이 될 겁니다. 첩약이든 제제든 간에 보험적용은 객관적인 데이터를 확보해 근거를 구축할 수 있는가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하며, 일괄적인 보험적용이 어렵다면 근거가 마련되는 대로 질환별로 하나씩 급여화를 시도하는 것이 빠를 수도 있습니다.

의과 쪽 보험을 생각해봐도 약이나 시술, 검사가 질환과 중증도에 따라 급여가 인정됩니다. 따라서 특정질환을 선정해 조건부 급여를 하고 시범사업에 참여할 개별 한의원, 한의병원의 임상의사를 훈련하고, 공통된 평가기준을 마련하고, 합의된 공통의 처방군을 만들어내고, 평가된 데이터를 축적할 전자의무기록 시스템을 설치하고,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하겠다는 일련의 계획 없이 덥석 2천억을 물어버리면 아마도 2천억이 들어간 첩약사업은 뚜렷한 의학적 효과가 없거나 효과가 있더라도 경제성 평가를 통해 그만한 비용을 들일 이유가 없다고 결론이 날 가능성이 큽니다.

특정한 질환군으로 범위를 좁혀도 보름치 투약만으로는 뚜렷한 의학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큰데, 과연 질환을 특정하지 않은 채 노인/여성환자들에게 보름치씩 한약을 투여했을 때 의학적으로 어떤 차이를 이끌어 낼까요? 약사보다도, 장기적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은 심평원이나 보건복지부가 될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판을 우리가 먼저 짜서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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