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명청출판과 조선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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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명청출판과 조선전파」
  • 승인 2012.10.2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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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균

김홍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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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청초의 출판문화의 발전과 조선 서적 간행에 관한 연구

황지영 著
시간의 물레 刊
조선시대의 서적출판은 민간에서보다는 정부가 주도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중국이 명나라와 청나라에 걸쳐 상업적 출판이 성행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특히 명말청초에 성행했던 방각본(坊刻本)의 대량 출판이 이뤄져서 서적의 대중적 성격이 강해지고 장서(藏書)의 수집이 확대되었지만, 문화교류의 최측근에 있었던 조선은 이웃 나라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의 출판이나 서적판매는 찾아보기 어렵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중국의 사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조선의 입장에서, 이토록 출판문화가 전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쇄문화가 세계 어느 나라에 못지않을 만큼 발달한 나라에서 서적의 출판이 저조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째서 그랬을까? 조선의 서적들은 대부분 관찬(官撰)이다. 물론 민간의 서책발행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 때부터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만들었던 기술력을 바탕으로 불경(佛經)의 발행을 위한 사찬(寺撰)이 있었고, 조선 후기로 가면서 족보(族譜)의 발행이나 문집(文集)의 간행을 위한 사찬(私撰)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부분의 문헌들이 관찬에 의해서 조달되었다. 그것은 곧 국정을 위협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 사상적 통제로 일관하였다는 얘기다. 세계 어디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500년이나 되는 긴 세월동안 조선을 유지할 수 있는 언론과 사상이 통제되었던 것이며, 이로써 인쇄와 출판문화의 다양성과 상업적 발달이 이뤄질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달리 생각해보자면, 조선이 중국을 유일한 대외지식의 창구로 삼고 선진적인 문물과 지식을 들여오고 있었지만, 일단 들여온 지식에 대해서는 조선의 실정과 필요에 맞게 선별해서 활용했던 것이다.

즉 비록 통제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실용적이고 민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부(子部)에 해당하는 서적들은 경향(京鄕)의 각지에서 끊임없이 발간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의서(醫書)는 비록 관찬이 많다 하더라도 비교적 커다란 제한 없이 간행이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이는 숙종 26년(1700) 경상도 지역의 책판기록인 「고서책판유처고(古書冊版有處考)」나 정조 20년(1796)에 만들어진 책판해제목록집인 「누판고(鏤板考)」를 통해서도,  중국에서 들어온 번각서(飜刻書)들 중에 의서가 포함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지방관아의 통치에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는 서적들이 보다 많이 포함되는 경향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의서의 편찬은 어떤 기준으로 선별해서 만들어졌을까? 고려시대부터 내려왔던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과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을 위시하여, 조선의 시작과 더불어 간행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과, 세종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방유취(醫方類聚)」등에 수록된 서적들의 선별기준은 무엇이며, 조선 중기에 들어와 「의림촬요(醫林撮要)」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수록된 서적들의 선별기준은 무엇일까? 오늘 이 책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적들에 포함된 중국서적의 채택기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또 하나의 과제를 가슴에 담는다. (값 2만 5천 원)

김홍균
서울 광진구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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