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 「말들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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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 「말들의 풍경」
  • 승인 2012.09.2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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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영

안세영

mjmedi@http://


한국어의 매력과 마력을 느끼고 싶다면?

고종석 著
개마고원 刊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로 밤잠을 설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두 번의 태풍이 휘몰아치고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찬바람이 느껴집니다. 가을이 온 것이지요. 포근한 이불을 깔고 엎드린 채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책장 넘기기 딱 좋은 계절인데, 혹 점찍어둔 책은 있으신가요? 저는 엉겁결에 「말들의 풍경」을 읽었답니다. 뭘 볼까 이리저리 생각하던 중, 뉴스에서 흘러나온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범의 이름이 하필 고종석이었거든요.

고종석 님은 꽤 유명한 글쟁이입니다. 코리아타임즈·한겨레신문·시사저널·한국일보 등에서 20년 넘게 기자생활을 하며 쓴 칼럼들도 적지 않거니와, 1995년부터 매 해 1∼2권씩 꼬박꼬박 단행본도 내놓았고, 재작년에는 「독고준」이란 소설까지 내신 분이잖아요?

6년여 전부터는 직장인의 멍에와 명예를 벗어던지고 ‘비상임 객원직’의 여유로움을 만끽하시는데, 이렇게 겉보기에 백수 생활이 가능한 것은 글쓰기만으로도 경제활동이 충족되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지금껏 낸 책이 20권을 훨씬 넘을뿐더러 지은이가 고종석이라면 무조건 사서 보는 고정적인 독자층까지 확보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말들의 풍경」은 이전에 펴낸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언문세설」·「국어의 풍경들」·「감염된 언어」 등과 같은 책들의 연장선 위에 있는 책입니다. 저자는 작년에 작고한 출판평론가 최성일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작가이자 신문기자이자 언어학자로 규정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우리가 쓰는 입말과 글말에 대한 지은이의 세 정체성이 집약되어 나타납니다. 문학평론, 저널리즘 텍스트 비평, 언어학 이론 등이 서로 긴밀하게 어우러지거든요.

책은 3부로 나뉘는데, 1부 「말들의 풍경」은 언어 현상에 대한 40여 개의 글들입니다. 저는 ‘님’과 ‘씨’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 ‘-빠’와 ‘-까’로 대표되는 ‘가르랑말(purr words)’과 ‘으르렁말(snarl words)’, ‘가시내’와 ‘짠하다’ 등의 방언을 포함시킨 가장 아름다움 우리말 열 개 등의 글들도 재미있었지만, 한글이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임을 일깨운 글이 제일 좋았습니다. 미국인 학자 게리 레드야드(Gary Ledyard)의 논문을 인용한 부분 - “글자꼴에 그 기능을 관련시킨다는 착상과 그 착상을 실현한 방식에 정녕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게다가 글자꼴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조음기관을(ㄱ·ㄴ은 혀가 놓이는 모양, ㅁ은 입모양, ㅅ은 이 모양, ㅇ은 목구멍을) 본뜬 것이라니…” - 에서는 자부심까지 불끈 솟구쳤으니까요.

2부 「말들의 산책」은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했던 선배 문인들 및 그들이 남긴 텍스트에 대한 비평글 모음인데, 이오덕·양주동·전혜린 등을 제외하고서는 익숙하지 않은 분들의 이야기라서 상대적으로 흥미가 덜했답니다.

3부 「말들의 모험」은 2009년 한국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된 8편의 글들입니다. 의도대로 언어학 이론과 언어학사의 번듯한 교직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쉽지만, 맛보기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말에 관심이 있다면, 한국어의 매력과 마력을 느끼고 싶다면, 무조건 이 책을 강추합니다. 아마 일독 후에는 ‘고종석 빠’까진 몰라도, 고정 독자 대열엔 분명 합류하실 겁니다. (1만 7천 원)

안세영 / 경희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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