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형상의학회 원행 동행 취재기-황제·손사막·신농씨 유적지 탐방 ③
상태바
대한형상의학회 원행 동행 취재기-황제·손사막·신농씨 유적지 탐방 ③
  • 승인 2012.08.30 1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은주 기자

신은주 기자

44juliet@http://


힘든 길이었지만 신농씨 유적 만나러간다는 설렘 가득

의료의 신이라 불리는 신농씨를 만나다
셋째 날 일행은 또 다시 버스로 3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한 신농씨의 고향 보계시로 이동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신농씨의 무덤 염제릉으로, 매표소에서 내려 염제릉까지는 도보로 4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서안에 도착해 연일 34℃ 가까이 되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됐고 이날 역시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걷는 일정이 많아 지쳐갈 만한데 일행의 표정은 신농씨의 유적을 만나러 간다는 설렘으로 가득해 보였다. 

현재 염제릉이 있는 산 이름은 상양산인데, 전설에 의하면 신농은 140세가 되던 해에 백초를 맛보다가 화염자를 잘못 먹어 중독이 되어서 보계시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져 있는 천태산의 연화봉 아래에서 음력 7월 7일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신농이 세상을 떠나자 천태산에 그의 아내와 자손들이 장례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왔는데 신농의 유체가 잠들어 있는 이곳을 이곳 사람은 신농골대라 부르고 있다.
이외에도 천태산에는 신농이 약을 캐다가 잠시 쉬었다는 신농채약동, 신농이 팠다는 신농정, 시장을 처음 열었다는 태양시의 유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1980년에 들어와서 신농의 유적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보계시 사람들은 길이 너무 험해 올라가기가 힘든 천태산 대신에 신농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곳 상양산에 거대하게 제사를 지내는 대전과 능을 새롭게 조성하고 1993년 4월 17일 천태산 연화봉 침골대의 흙을 파다 이곳으로 옮겨 이장을 했다는 것이다.

염제대전 앞에서 윤창열 교수와 이인수 원장, 정행규 원장이 향을 올리고 있다.
한참을 오르니 염제대전이 나온다. 염제대전은 염제신농을 제사하는 정전으로 벽에는 ① 상양육염(常羊育炎) ② 욕성구룡(浴聖九龍) ③ 농업지신(農業之神) ④ 태양지신(太陽之神) ⑤ 의약지신(醫藥之神) ⑥ 염황결맹(炎黃結盟) 등의 의미가 담긴 6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대전을 지나면 염제릉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뜨거운 태양을 등지고 힘겹게 올라왔지만 염제릉으로 가기 위한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가파른 계단을 오른 후에야 비로소 염제릉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온 몸을 땀으로 흠뻑 적셔가며 힘겹게 오른 보람이 있었다.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 보계시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한 줄기 불어오는 바람은 기분을 한결 상쾌하게 해주었다.  

염제릉 앞에는 ‘염제릉’이라고 쓴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염제릉이 천태산에 있을 때 제릉, 가릉, 반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릉은 후인들이 염제를 오랫동안 제사 지내왔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또 이 무덤이 있는 천태산을 제릉이라고 부르고도 있다고 한다.

가릉은 신농씨 당시에 丹雀鳥가 아홉 이삭이 달린 아름다운 곡식을 물고 와서 천태산에 떨어뜨렸는데 염제가 이를 주워 땅에 심자 이후 생산이 크게 늘어서 사람들의 식량이 풍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염제가 죽자 단작이 가곡(嘉穀)을 떨어뜨린 곳에 묻고 사람들이 염제가 오곡을 먹게 해 준 은덕을 기려 이곳을 가릉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가릉강이 여기서 발원하는데 이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이라 한다.

반총은 염제 사후에 염제의 딸 요희가 매년 7월 7일 염제가 살아있을 때 가장 좋아했던 이 반도를 가지고 제사에 올렸으므로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천태산을 또 반총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염제릉 관람을 마치고 일행은 위하의 북쪽, 시정부의 맞은편에 있는 염제사로 향했다. 염제사는 1993년에 완공된 사당으로 입구에는 국무원 부총리 전기운이 ‘炎帝故里’라고 쓴 큰 패방이 서 있다.
염제사라고 쓴 금색의 글자 아래에는 ‘華夏始祖’라는 글이 있고, 그 아래 입구 우측의 기둥에는 뇌사벽개천지혼돈(쟁기와 보습을 만들어 혼돈했던 천지의 문명을 열었고) 좌측에는 가화결출화하문명(아름다운 곡식 열매 맺어 중화의 문명을 만들어 내었네)이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

사당 내에 모셔져 있는 염제의 소상(塑像)은 높이가 5m로 중국 5천년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곳의 염제상은 특이한데 머리에는 2개의 뿔이 솟아있고 몸에는 가죽옷을 걸치고 있는데 전설에 나오는 본래 염제의 모습이라고 한다. 뒷면 좌우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은 염제의 어머니가 염제를 낳는 모습이고 오른쪽 그림은 염제가 嘗百草하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계속>

중국 서안 = 신은주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