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형상의학회 원행 동행 취재기-황제·손사막·신농씨 유적지 탐방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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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형상의학회 원행 동행 취재기-황제·손사막·신농씨 유적지 탐방 ②
  • 승인 2012.08.2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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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주 기자

신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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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왕산 北洞과 南庵에서 찾은 손사막의 흔적들

「황제내경」과는 관계없는 황제릉
이튿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전 8시 30분 일행은 서안에 있는 숙소에서 버스로 약 3시간에 걸쳐 동천으로 이동했다. 이날 첫 번째 일정은 황제현의 황제릉을 방문하는 것으로 황제릉 인근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보니 꽤 먼 거리를 달려오긴 왔나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황제릉 입구에 들어서긴 했으나 황제릉까지는 또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다. 황제릉에 이르는 길에 윤창열 교수(대전대 한의대)는 황제릉에 대해 설명했다.

윤 교수에 따르면, “황제는 일찍이 내수산의 구리를 채취해서 지금의 호북성에 있는 형산에서 솥을 주조했으며 솥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용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그를 맞으러 왔다”고 한다. 황제는 용을 탔고 여러 신하들과 후궁 등 70여 명도 함께 용을 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탈 곳이 없어 용의 수염에 매달렸다. 용은 힘차게 날아 올라갔고 이때 수염이 빠지면서 수염에 매달렸던 사람들은 땅에 떨어지고 또한 황제의 활도 떨어졌는데, 사람들은 활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그 땅을 ‘정호’라 부르고 활은 ‘오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룡은 하늘을 날다가 교산에 내려앉았고 이때 황제와 대신들은 이별을 했다고 한다. 황룡이 다시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사람들은 황제의 의관, 신발, 보검을 교산에 묻어 지금의 황제릉이 됐다는 것이다.

덧붙여 윤 교수는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황제내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황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황제내경」과 황제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신농본초경」이나 「황제내경」 등이 모두 한나라 때 완성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책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접두사로서 신농이나 황제를 붙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명의 손사막 흔적을 발견하다
황제릉에서 나와 일행은 손사막 유적이 남아있는 요현으로 향했다. 보통 버스로 3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거리이지만 이날은 유난히 교통이 지체되어 예상 도착시간이 계속 늦어졌고, 버스가 제 속도를 내지 못할 때마다 일행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 번은 버스가 아예 앞으로 나갈 줄 모르고 멈추어 서자, 일행은 버스 밖으로 하차해 멈춘 차들 사이를 오가며 라면과 과자 등을 파는 잡상인들로부터 먹을거리를 구입해 허기도 채우고, 오랜 승차시간으로 불편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해소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또 손사막 유적지 인근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손사막 유적지를 안내했던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가이드와 버스운전기사가 길을 찾는데 다소 힘들어했다.
때문에 비록 그곳에 찾아가는 길은 힘들었어도 동네 주민 외에는 거의 인적이 드물다는 장소를 찾아 탐방한다는 사실에 개인적으로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며, 일행 역시 이색적인 경험에 대한 흥분에 더해 그동안 책과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장소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기대로 부풀었으리라 생각된다.

 

약왕산 북동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형상의학회 원행 일행이 포즈를 취했다.
우여곡절 끝에 버스는 손사막이 진료하고 책을 저술했던 약왕산 입구에 들어섰다. 약왕산의 본래 이름은 오대산으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동쪽의 봉우리를 서응대, 남쪽을 기운대, 서쪽을 승선대, 북쪽을 현화대, 가운데를 제천대라고 불렀는데, 이 다섯 산의 꼭대기는 가파르지 않고 대처럼 평평하여 오대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명나라 융경 6년(1572년)에 손사막이 쓴 「천금방」에 있는 의방들을 다섯 개의 비석에 세워 산 위에 세워 놓아 그 이후로는 이 산을 약왕산으로 불러 왔다는 설명이다.

약왕산문을 지나 걸어 올라가자 왼쪽에 법수신정이 나왔다. 당시 사람들은 태현동의 물을 구해 환자를 치료하는 습속이 있었는데, 손사막 역시 오대산 태현동의 물을 구해 사람들을 치료한 적이 있었고 이 물을 법수라고 했다고 한다.

윤 교수는 “법수로 죽을 끓여 먹거나 약을 달여 먹으면 효험이 뛰어났다고 하며, 물을 구하는 자가 점점 많아지자 한 도사가 우물을 파고 그 위에 집을 지어서 태현법수라 이름을 붙였고, 물을 구하고 기도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자 그 이후 사람들은 이 우물을 신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약왕산은 크게 약왕대전과 마애석각, 비림 등이 있는 약왕산의 북동(北洞)과 손사막이 생활했던 남암(南庵)으로 나뉘는데, 일행은 먼저 진인사광장을 기준으로 왼쪽에 위치한 북동으로 향했다.
북동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입구에는 청허지천이라고 쓴 패방이 있고 계단의 좌우 난간의 기둥은 모두 사람의 얼굴로 돼 있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약왕대전에 이르렀는데 이곳이 약왕 손사막을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중심지로 매년 음력 2월 2일이 되면 멀리서는 국내외에서 가까이는 주위 100여 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목적지의 예상도착시간이 훌쩍 지나고 약왕대전으로 들어서는 입장시간도 이미 지났는지 그곳의 입구는 굳게 닫혀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돌아서려 했지만 일행 중 한 회원이 문을 두드려 보았다. 몇 번 시도해보자 일행의 간절한 마음이 닿기라도 하듯 기적과도 같이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약왕대전 안에 들어서자 일행은 비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정 안에는 5개의 비석이 서 있는데 태의정성비, 태의습업비, 천금보요비, 해상방비등이다. 이 중 천금보요는 송나라 때의 곽사라는 사람이 이곳 화주에서 관리생활을 할 때 손사막의 「천금요방」 중의 의론, 의방 및 자신이 임상을 통해 경험한 효험이 있는 처방 9백여 수를 모아서 6권의 책을 만든 것이라고 하며, 해상방은 손사막이 민간의 단방, 경험방을 수집하여 만든 것으로 질병을 121수의 칠언가결로 만들어 외우기 편리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이것들을 진왕, 주수중이 1572년 이곳에 새겨 놓았고 이후 오대산은 약왕산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라는 윤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약왕산 북동 관람을 마친 후 일행은 손사막이 「천금익방」을 쓴 남암으로 향했다. 남암으로 오르는 길에서는 조금 전 관람했던 북동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 오랜 도보로 무거워진 발걸음을 그나마 가볍게 해주는 힘이 됐다.

남암은 손사막이 134세가 되던 해에 당고종에게 귀향하기를 청하고 돌아와서 「천금익방」을 지은 곳이다. 남암을 관람하면서 윤 교수는 손사막의 생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541년 요현의 손가원촌에서 태어난 손사막은 7세 때 공부를 시작해 하루 1천여 자 이상을 외웠다고 한다. 16살 때 위국공 독고신이 “이 아이는 성동(聖童)”이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이후 손사막은 의학을 공부하고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으며, 유불선의 삼도와 제자백가를 깊이 있게 공부했다. 그는 노자와 장자에 주를 달았고 40여 세 때는 태백산에 은거하기도 했고 종남산, 청성산 등을 유람하기도 했다.
그가 「천금방」을 지은 것은 그의 나이 112세 때로, 천금방 서문에서 “사람의 목숨은 아주 소중하여 천금처럼 귀중하고 하나의 처방으로 사람을 살려내면 그 은덕이 천금보다 뛰어나다”라고 해 「천금방」이란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남암을 관람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해가 저물어갔다. 아주 오래 전 손사막은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일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겠다는 다짐과 그만큼 학문에 더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으로 하루를 마감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보며 손사막의 유적지를 떠나 다시 서안에 있는 숙소로 이동했다. <계속>


중국 서안 = 신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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