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한의학 논문 평가, 대안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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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한의학 논문 평가, 대안은 없는가
  • 승인 2012.07.1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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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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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 왕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것이지만, 한의대의 교육과 연구는 갈수록 멀어져만 가고 있는 실정이다. 교과서에는 십이경락과 오장육부 한열허실이 지면을 메우고 있는데, 교수들의 논문은 온갖 분자생물학의 술어들과 통계학 개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학문분야에 무관한 획일적 방식으로 한의대 교수의 업적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업적 평가결과에 따라 교수들의 보수가 바뀌기 때문에 한의대 교수들도 그에 맞추고자 애를 쓸 수밖에 없다. 이러한 획일적 평가에 사용되는 대표적 수단이 과학저술인용목록, 즉 SCI와 영향력 지수, 즉 임팩트 팩터(IF)다.

어떤 사람은 “학술적 성과를 수치로 측정할 수는 없다”며 정량적 평가자체에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소위 식스시그마 기법의 제창자인 마이클 해리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현실은 “수치화되지 않으면 개선할 수 없다” 현재 상태가 어느 수준인지 말할 수 없는데, 어떻게 개선 개악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수치적 평가에 지금의 방식이 최선일까 하는 점이다. 사실 지금의 계량서지학적 평가가 가지는 문제점은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해 왔다. 한의학 논문평가에 SCI를 들이미는 사람들도 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물론 그냥 외국 것이 좋다는 생각에 이를 찬성하는 한심한 인사들도 있겠으나,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그런 몰지각한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진심으로!). 그렇다면 이처럼 생각 있는 분들도 SCI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논문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학계의 원로가 정하면 되는가. 소위 ‘명의’들이 정하면 되는가.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학문은 그 학문이 성취하고자 하는 과제가 있다. 한의학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한 논문이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평가방식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지만, 현대 수학사에서 소위 ‘7대 난제’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이런 방식 역시 충분한 권위를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방식이 한의학 논문평가에 적용되려면 우선 한의학의 세부주제와 해결과제가 잘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한의학의 연구 교육 괴리현상은 교과서와 논문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그렇다면 교과서에 기여한 논문에 점수를 부여하는 평가방식은 어떨까? 이런 제도를 시행한다면 학회마다 자기 회원들의 논문으로 교과서를 ‘도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면 얼마간은 그래도 좋을 것 같다. e-book 형식을 써서라도 최신지견을 담아보려는 것이 오늘날의 교과서인데 우리 교과서들은 어떠한가? 심한 경우 몇십 년째 같은 내용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교과서 인용지수를 활용한 논문평가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국내 학술지의 평가를 총괄해 왔던 한국연구재단이 소위 등재지 선정을 중단하고, 2014년 이후 학술지평가를 학문별 자율평가로 전환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지 못하나, 차제에 우리의 독자적 논문평가방식을 과감히 제안해 보면 어떨까.

그런데 이쯤에서 더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자. 정말 “수치화되지 않으면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일까. 진화학이 알려준 교훈이 있다. 생물은 어떤 목표를 향해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고릴라는 덜 진화했고 침팬지는 더 진화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생물은 왜 진화하는가? 생존을 위해서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다양성이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특정 학문이 어떤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규정할 수 없다. 학문의 건전성은 바로 다양성이다. 유효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얼마나 과감히 해 보았는가. 이것이야말로 논문의 가치를 평가할 좋은 척도다. 수치적 평가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정해진 목표에 얼마나 근접했는가를 평가하는 수치가 아닌, 얼마나 다양한 시도를 했는가를 평가하는 수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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