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42) -「赤水玄珠」
상태바
고의서산책(542) -「赤水玄珠」
  • 승인 2012.06.21 16: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상우

안상우

mjmedi@http://


정조시대 풍미한 역대의가 임상방론

 

「적수현주」 사고전서본

많은 분량에 임상 각과를 아우르고 있기에 일명 「적수현주전집」이라고도 부른다. 明의 孫一奎(1522~1619)가 지은 것으로, 그는 자가 文垣, 호를 東宿, 혹은 生生子라 불렀으며, 休寧(지금의 안휘성 휴령현)사람이다.

그는 허준과 동시대 인물이지만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동의보감」보다 앞서 간행되었으나, 곧바로 조선에 도입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본초강목」의 경우처럼 명청 교체기에 나와 미처 쓰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원서는 30권이며, 1584년에 처음 간행되었다. 권말에 「醫旨緖餘」 2권과 醫案 5권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모두 합하여 ‘孫氏醫書三種’이라고도 부른다. 훗날 「四庫全書」ㆍ子部ㆍ醫家類에 편입할 때, 「의지서여」를 별도의 서적으로 분리하여 함께 수록하였다. 그의 의안은 「사고전서」에 들어있지 않으며, 그의 아들과 문인들이 357례에 달하는 치험례를 편집하여 「孫文垣醫案」이라 이름 붙여 1573년에 간행하였다고 전한다.

전서의 내용은 풍문, 온역문, 화열문 등 76문(四庫提要에서는 70문이라 하였는데, 현행 사고전서본에는 세부목차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 편제를 한눈에 살펴보기 어려움)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每門은 다시 병증을 위주로 세분하여 한열, 허실, 표리, 기혈에 따라 꼼꼼하게 밝혀 놓았다. 또 고금의 병증 명칭 가운데 서로 뒤섞여 혼동되는 곳을 분명하게 나누어 변론해 놓았기에 후세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總纂官 紀昀은 그가 이렇듯 명석함에도 불구하고 권10 虛怯虛損勞瘵門에 方外還丹편을 붙여놓고 運氣補液하는 방법을 전문적으로 기술한 것은 의학의 正道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그가 평소 의술을 빙자하여 공경대부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며, 이 책의 커다란 瑕疵가 되었다고 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탄식하였다.

본서에서 다루고 있는 범주는 내과, 외과, 부인, 소아 등 각과 질병의 변증치료를 포괄하고 있으며, 변증에 있어선 「내경」과 各家學說을 인용하고 개인의 의료경험을 결합하여 병인, 병증, 처방을 나누어 기술하고 아울러 여러 의가의 치험례를 덧붙여 놓았다. 다만 침구와 약성, 도인, 식치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여하튼 그는 임상에서 매우 뛰어난 명의로 이름이 높았는데, 다른 의원들이 攻邪를 말할 때 혼자서 補虛를 주장하였고, 남들이 下法을 쓸 때 그만이 涌吐시켜 자기만의 독자적인 술법을 구사하였기에 후인들의 師表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본문 가운데서는 ‘生生子曰’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자신의 의학적인 견해를 요처마다 밝혀 놓았다.

정작 이 책이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갖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조선후기 정조시대 의학을 대변하는 「濟衆新編」에 주요 引用方書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간행 이후 조선에 곧바로 도입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사고전서」에 채록될 즈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선에 알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다산의 「마과회통」에 孫一奎가 1602년에 펴낸 「痘疹心印」(전서 권27~28에 수록)이 인용된 것도 이 같은 정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종합임상전서임에도 불구하고 「동의보감」과 같은 일목요연한 체계를 갖고 있지 못하며, 종설에서는 제가설이 골고루 취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원리론보다는 각 방제마다 역대의가의 뛰어난 方論을 채택해 수록하고 여기에 저자 자신의 임상견해를 잘 취합하여 편집한 임상방서로서의 특장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