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2] 無如 申卿熙 선생(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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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2] 無如 申卿熙 선생(上)
  • 승인 2003.05.2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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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濟蒼生의 慈悲佛事 베푼 名醫


무여 신경희 선생(1919~2000)은 젊어서는 하루에 수백명의 환자를 보고,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기 직전 81세까지도 하루 70~8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의사의 진면목을 정확히 판별하는 것은 환자의 눈. 오랫동안 환자의 신뢰를 받아 온 선생의 임상능력은 1950년 대한불교달마회를 창립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 부회장을 역임(1976)하면서 禪書 ‘蕪門關譯解’를 펴는 등 불교신자로서 선도 수련과 학문연마를 병행한 결과였다.

● 병증 진단에 5초

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무여 선생의 부친은 낙향한 선비로 가세는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졌다. 이 가운데 부친은 틈틈이 한의학 지식으로 이웃 환자를 돌봤고, 무여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선친에게서 한의학을 전수받았다.

주위에 따르면, 일제시대 한의학 교육기관이었던 강습소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제마 선생의 제자에게서 학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3세에 상경한 이후 1936년 침술면허, 57년 한의사 면허를 취득해 인천 창제한의원을 개원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환자를 진료하게 된다.

길게는 3년 간 집을 떠나 약재 공부를 위해 산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그가 환자의 병증을 진단하는 시간은 5초 이내에 끝난다. 불문진단으로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진맥을 해 병의 경 중을 헤아리고 침과 약으로 다스린다.

88년부터 1년간 창제한의원에서 부원장을 지냈던 장만수(44·경기 큰기운한의원) 원장은 “선생님은 열성을 다해 한시도 쉬지 않고 환자를 보았고, 그 수가 인간이 볼 수 있는 최대의 수였다”면서 “빠른 시간 안에 환자의 병증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뛰어난 직관력으로 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특히 선생의 정확하고 신속한 판단력은 ‘높은 불심과 학력에 의해 대오각성한 경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그를 아는 이들의 한결같은 평이다.

무여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서 96년부터 별세하기 전까지 그의 곁에서 임상을 지켜봤던 이형주(44·서울 수강한의원·경희대 한의대 외래교수) 원장은 “선생님은 환자를 보면 상태를 알 수 있으며, 진맥을 통해 진단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아울러 “일부 시각에서는 신기에 가까운 선생님의 능력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폄하하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선생 님은 불가에서 화두를 깨친 분으로 전통동양학문의 입신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학문을 연마하고, 풍부한 임상에 단 련된 결과 놀라운 능력을 습득하시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진료실에 들어오는 여성을 본 후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당신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말해 모두가 어리둥절했는데, 마침 그 여성은 양방병원에서 종양이 있음을 확인하고 내원한 환자여 서 환자는 물론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무여 선생은 늘 환자가 말을 꺼내기 전에 병증을 알려줌으로써 환자의 신뢰까지도 얻었다.

진료 영역은 난치성질환까지 막힘없이 포괄했다.

이형주 원장은 “선생님을 통해 한의학의 우수성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무여 선생의 2남2녀 중 막내딸 신귀선 씨(56)의 남편은 양방의사이다. 신귀선 씨에 따르면 남편은 한의학에 대해 불신했는데, 한번은 무여 선생의 치료로 암 덩어리가 변으로 배출된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그 종양덩어리를 가지고 대학병원연구실에서 살펴본 결과 종양임을 확인하고, 무여 선생과 한방의학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됐다고 한다.

또한 무여 선생은 침술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는데, 환자에게 빠짐없이 침을 시술했다. 그는 “침을 놓으면 약과 함께 치료효과가 좋아지는 것이 자명한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면서 몰려드는 환자에게 일일이 침을 시술했다.

이렇게 정확하고 신속한 진단과 침술력에 대한 증언은 젊은 시절 하루에 최고 1천명까지 환자를 봤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한편 무여 선생은 의사 사위에게 담석덩어리를 가져오도록 시켜 그 담석을 가지고 여러 약재에 담궈 녹는 것을 시험하는 등 말년까지도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 神童 한의사 별명 얻어

무여 선생이 집필한 한의학書로는 유일하게 ‘창제증방(1990)’이 남겨져 있다. 이 책은 1960년 ‘창제험방’이라는 제목으로 낸 책을 다시 각과로 정리하여 1870여방을 정선한 것이다.

배원식(한국동양의학회 회장·대한한의사협회 명예회장) 선생은 신 선생의 저서 ‘창제증방’을 추천하는 글에서 무여 선생을 “인천시내에서 창제한의원을 개원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신동 한의사라는 별명까지 얻게 돼, 그 명성이 경인지방에 까지 퍼지게 됐다”고 소개하면서 신 선생의 학문이 집필된 유일한 이 책에 대해서는 “황도연 선생의 ‘방약합편’ 다음 가는 새로운 시대의 방약합편이라 하여도 조금이 손색이 없는 훌륭한 寶筏書”라고 평가했다.

崇山行願(당시 在美 弘法院長) 스님은 “무여 신경희 거사는 의술을 수련하여 제중의 불심에서 병리·약리의 오묘한 이법을 정통했다”면서 “禪心醫心一如의 경지에서 심혈을 기울인 광제창생의 염원을 實修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 경험방은 중풍과·신장성중풍·痲木·신경통·관절염·어혈병·상한 등 선생이 임상과 학문을 통해 얻은 처방 1천8백여가지를 담고 있다.

처방은 내용과 양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중국방에 가까울 만큼 양이 많고 약력이 강하도록 구성됐다.

이형주 원장은 “과감하고 대범한 처방들에서 한의학의 대가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계속>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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