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24) 「東武格致稿」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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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524) 「東武格致稿」①
  • 승인 2012.02.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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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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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武의 자전적 과학철학서

 

東武 李濟馬(1838~1900)가 남긴 자전적 철학서 「格致稿」의 轉寫本으로 1930년 渭人 姜齊模란 사람이 서울에서 謄寫한 것이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경성부 광화문통에서 문을 열었던 壽東藥房 主 崔承達이 소장하다가 서지학자 南涯 安春根의 손을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구 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목록이 기재된 면에는 2과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다. 인면을 읽어보니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서인’과 ‘안춘근장서기’라고 새긴 각인이 읽혀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유전 내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필사하여 전한 姜齊模란 인물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권미에 ‘歲庚午陰五月四日’로 등사시기가 적혀 있어 이 사본이 1930년 5월 4일에 작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畢書于漢陽北岳山下”라는 명문이 적혀 있어 필사자는 동무 사후 동무의 제자에게 공부한 재전제자에 해당하는 인물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 필사본의 전존 내력에 대해 필자는 일찍이 “1940년 韓斗正이 간행한 초판본에는 부록으로 ‘濟衆新編’과 ‘遺稿抄’가 덧붙여져 있는데, 1930년 姜齊模가 필사한 정신문화연구원 소장본에는 2편의 부록이 빠져있다. 이는 아마도 「격치고」 원문의 정리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거나 「동의수세보원」이나 「동무유고」의 정리 과정에서 철학적 성격을 고려하여 「격치고」에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제90회 八道風俗과 四象人 「格致藁-附錄」, 2001년 11월 19일자)라고 말한 바 있다.

잘 알다시피 이제마는 생전에 노경에 이르도록 여러 차례에 걸쳐 「동의수세보원」을 개정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거듭했다. 마찬가지로 이 「격치고」 역시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여러 편의 글을 탁마하여 조합하는 과정에서 몇몇 단편들이 새로 추가되기도 하고 때론 본문에서 제외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지와 목록에는 서명이 그냥 ‘격치고’라고 되어 있으나, 卷首題에는 ‘東武格致稿’라고 다소 다르게 쓰여 있다. 또 각권의 권두와 권미에 역시 서제를 ‘東武格致稿’라고 명기하였고, 유략편의 서두에도 ‘東武儒畧’이라고 편명에 ‘東武’라는 두 글자를 덧붙여 표기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제자들이 동무가 남긴 글을 옮겨 적으면서 스승의 글임을 강조하려고 서두에 ‘동무’라는 호를 앞세워 붙인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것은 당시 제자들 사이에 본문 내용이 서로 다른 異本이 존재하였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된다.

표지 이면에는 1970년에 안춘근이 자필로 기재한 간략 서지가 적혀 있는데, 특별히 崔麟自傳에 근거하여 저자인 이제마 선생을 최린의 恩師로 특기하고 있다. 또 한의사의 저작을 후세 한의가 소장하고 애독하던 것이라고 적어놓은 것으로 보아 한의가 대를 물려 世傳하는 특성을 강하게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고전 한의서가 전통지식의 보고로 주목받기 이전이어서 진즉 필사본 한의서의 중요성을 간파한 서지학자의 예지력이 감탄스럽기만 하다.

이어 ‘격치고 목록’에는 전3권의 대강이 한눈에 들어오게 잘 정리되어 있는데, 권1은 儒略편인데, 事物-觀仁-志貌-天下, 四戒-天勢-天時-天下索我, 我止-土氓-遊民箴-大風箴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권2는 反誠箴인데, 乾箴-乾箴下截-兌箴-兌箴下截, 坤箴-艮箴-艮箴下截-离箴, 离箴下截-震箴-坎箴-巽箴, 太極의 차례로 기술하였다. 권3은 獨行篇인데 작은 글로 나누어지지 않고 단 1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호에 본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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