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17)-「農書」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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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517)-「農書」①
  • 승인 2011.12.1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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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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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農遺業, 재배기술의 개발과 보급

 

이 책은 초기 한의고전명저총서 사업의 일환으로 수집된 자료로서 아직 학계에 보고된 바 없는 본초관련 희귀서이다. 왕조 시대에는 흉년이 들었거나 재해나 병충해로 농사를 망친 경우, 생산량을 증대하고 기아를 해결할 목적으로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농서를 수집[求農書]하는 한편, 신기술을 적용한 농법을 장려하기 위해서 책으로 펴내 보급하곤 하였다.

조선조 들어서서는 이미 태종조에 方言(이두)을 써서 주석한 농서를 편찬하여 내외에 널리 반포하였다는 기록이 「國朝寶鑑」과 세종 때 펴낸 「農事直說」의 서문에 전해진다. 또 중종조에는 金安國이 農書를 언해하였다고 하며, 1585년에 간행된 「고사촬요」 八道冊板에는 전주, 담양, 안동, 진주, 평양 등지에 농서의 판본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전국 각지에 광범위하게 배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정조 23년(1799)에 南極曄이 왕명에 따라 지은 농서로 1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는 대신 長文으로 된 農書簿冊이 맨 앞쪽에 배치되어 있다. 전체 목록을 표기한 첫머리에는 “校正幼學 臣 南極曄 製進”이라고 되어 있는데, ‘製進’이란 말은 왕명에 따라 詩文을 지어 올린다는 뜻이므로 저자 남극엽이 정조의 어명을 받고서 지어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보의 논고, 「애경 남극엽의 시가 연구」에 따르면, 그에 관한 기록 중에 “己未春 著對農書”라 하여 기미년에 농서를 지어 바쳤다라고 적은 구절이 보이는데, 바로 이 자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책의 권미에도 역시 “己未二月 日 潭陽 幼學 臣 南極曄”이라고 적혀 있는데, 정조 23년(1799)은 己未년으로 위에서 제시한 사료의 기록과 일치한다.

「정조실록」에 직접적인 언급은 보이지 않으나 정조 23년을 전후로 농사에 관련한 신하들의 상소와 임금의 下敎가 많이 보이며, 실제 이 해에 朴趾源의 「課農小抄」, 李大圭의 「農圃問答」, 徐浩修의 「海東農書」, 趙英國의 「農書總論」 등이 저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책도 당시 이러한 정황 속에서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전본의 전존 상태로 미루어 저술 당시의 자료로 보기는 어려우며, 아마도 후대에 여러 차례 轉寫를 거듭하여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전문은 22쪽의 비교적 적은 분량으로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임금의 하명에 대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 첫 번째 부분이고, 농사의 방법을 설명한 부분이 두 번째 부분이다. 그 차례는 農書簿冊, 耕治, 糞田, 播種, 水種, 付種, 代田, 耘耔, 灌漑, 田制, 節序, 蠶織, 經驗, 便宜, 救弊, 均田, 禁制 등의 순서로 꾸며져 있다. 마지막으로 권미에는 ‘進書文’이 붙어 있다.

農書簿冊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농사의 중요성과 역대 왕들이 나라의 농업을 진작시키기 위해 공을 들인 내력이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다. 또 임금이 하명한 글에 대하여 조목조목 대답을 올리고 있다. 그 외에 농사와 관련된 본문의 내용들은 老農과의 문답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농사의 방법을 간략히 요약하는 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특정지역에서 새로 개발된 농사법을 정리하여 중앙으로 상달하고, 이를 토대로 전국에 신기술을 배포하였던 조선시대 농법과 관련한 지식보급체계를 살펴볼 수 있다. 전통시대 약재의 생산과 수급 역시 농사의 일환으로 간주되었으며, 山林에 묻혀 사는 이라도 반드시 갖추어야할 필수 경제지식으로 여겨졌다. 다음 호에는 저자와 관련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하도록 한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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