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02) -「소문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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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502) -「소문사설」
  • 승인 2011.08.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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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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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밤의 榮華 御醫의 일생

「소문사설」 국립중앙도서관소장본,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필자는 근래 조선조 의관들이 정리해낸 의약지식들이 17∼18세기 사대부가를 시작으로 점차 민중들에게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건강상식으로 파급되었음을 역설한 바 있다. 여기 또 하나 대표적인 실례 가운데 하나로 삼을 만한 「소문사설」을 소개한다.

엮은이는 숙종 때 어의를 지낸 李時弼이란 사람으로 숙종 때부터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의관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기술개발과 생활지식을 개량하는 창의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책에 담긴 온돌개량이나 여러 가지 생활도구의 개량, 음식으로 치료하는 방법, 또 갖가지 약제의 제조법과 일용잡화를 다루는 잡방이 풍부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종전까지만 해도 이 책의 저자가 譯官이었던 李杓(1680∼?)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 조선에 체류하면서 한국의학문헌과 의학의 역사를 탐구했던 三木榮의 고증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본문 가운데 ‘식치방’에 실린 다음의 언급을 통해 궁중에서 일한 의원이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전에 寧遠衛 謝長의 집에서 병을 고쳐준 일에 사례하며 대접해 주었는데, 과연 맛이 좋았다”라든가 “심양장군 宋柱의 집에서 병을 고쳐준 일에 사례하며 작별하는 자리에서 대접해 주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통 음식으로 여겼으나 정사인 東平都尉가 알아보았다”는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심양장군 송주는 1711년에 부임 중이었고, 東平尉 鄭載崙(1648∼1723)은 그해 冬至兼謝恩正使로 연행하였으며, 이 책의 저자 이시필도 역시 수행의관으로 동행하였던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기록만 보더라도 그는 1694년 1711년 1716년 잇따라 연행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李頤命(1658∼1722)이 내의원 도제조로 있는 동안 보좌했으며, 1714년에는 숙종의 병을 고친 공로로 정3품 堂上官階인 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저자 이시필(1657∼1724)은 본관이 경주이고 호가 聖夢이며, 1678년(숙종 4) 무오식년시 의과에 입격하였고, 여러 차례 명나라에 가는 사절의 일행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는 의관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내의를 거쳐 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나, 인생행로는 마냥 화려하고 영예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723년(경종 3) 다른 의관들과 임금의 환후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노쇠하여 귀가 어두웠던 탓에 많은 말을 잘못 알아듣고 ‘소 궁둥이로 풀을 먹이는 격[飼草牛後]’이라는 失言을 내뱉었다. 이로 인해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죽음만은 면하여 제주의 旋義縣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제주에서 경상도 남해로 옮겨와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해박한 식견과 평생 갈고 닦은 뛰어난 기술에 견준다면 너무나 허망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유배된 것은 실언 때문이기보다는 노론의 영수였던 이이명을 따른 것이 빌미가 되었던 것으로 훗날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다시 집권하자 그도 역시 신원된 사실로 보아 정치적 입지에 따라 부침과 영락을 거듭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의 이름은 ‘좁은 소견과 경험한 일을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이다. 특별히 이 책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온돌 만드는 방법, 각종 기계 및 기구 만드는 법, 여러 가지 음식 조리법과 다양한 치료법이 들어 있어 한마디로 의식주에 관계되는 잡학사전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전문은 크게 4부분으로 나뉘는데, 전항식(甎炕式), 利器用篇, 食治方, 諸法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 호에 의약과 관련성이 깊은 내용을 몇 가지 간추려 소개해 보기로 한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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