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00) - 「經髓三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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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500) - 「經髓三編」
  • 승인 2011.08.0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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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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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同世界를 향한 石谷經學의 眞髓

 

경수삼편

石谷 李圭晙(1855∼1923)이 '大學'과 '中庸', 그리고 '禮記'의 禮運篇을 주석하여 펴낸 경학 注疏集이다. 원래 '대학' '중용'도 '예기'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예기'가운데 가장 중요한 3편을 간추려 경학의 입문으로 삼고자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뜻은 저자의 서문에 잘 집약되어 있는데, “大學은 詩書의 目錄이요, 中庸은 禮易의 先路이다. 또 禮運은 春秋의 指南이다. 그러므로 五經은 道學의 大海요, 三篇은 五經의 航路이다”라고 말해 이 3편이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로 이어지는 유학의 5대 경전을 이해하기 위해 정수를 가려 뽑아 모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곧이어 저자는 “이 3편만을 고집하고 5경을 읽지 않는다면 마치 배만 가지고 있으면서 큰 바다를 건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마땅히 차례대로 익혀나가 작은 지식에 안주하여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끝까지 학업을 이룰 것을 당부하였다.

서문격인 ‘經髓三篇總論’에 이어 ‘古本庸學原委’를 두었는데, '예기'로부터 출발한 '중용'의 가치뿐 만 아니라 漢代 이래 경학의 유래와 역사를 설명하고 있어 石谷 經學의 연원을 드러낸 주요 부분이다.

저자는 “漢代 鄭玄의 注와 孔穎達의 正義가 있어 唐宋代에 이르기까지 '禮記' 해석의 기준이 되었고 河南 程氏가 처음 '대학'과 '중용'을 드러내어 학문의 요체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후 紫陽[朱熹]이 이를 이어받아 章句를 지어 혹은 모아서 보태고 혹은 나누어 부연했으니 …… 대개 이것이 宋學의 흐름이다”라고 개괄하였다.

그는 이어 永樂연간에 세상의 책을 모아 편집하면서 漢學(古經學)이 廢絶되고 道學이 흐려져 맥이 끊기었다고 말했다. 또 청대에 이르러 乾隆 年間에 古本을 다시 인출해 한학이 다시 조금 살아났다고 평했는데, 뒤이어 다행이도 학맥이 동쪽으로 건너와 '四庫全書'의 古本注를 보고서 1000년을 뛰어넘어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石谷이 주로 '사고전서'에 실린 古經註釋에 힘입어 명대 이후 경학설의 혼란상을 정리하고 古經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의 입장은 경전해석에 있어 鄭玄의 주석을 위주로 하되 몇 가지 작은 흠집은 朱憙의 章句로 보완하였고 그래도 혹시 미진한 곳이 있으면 자신의 생각을 ‘管見’으로 덧붙였다고 표명하였다. 끝으로 “飮水者, 冷暖自知요 陟山者, 高低自認이라”하여 주저하지 말고 학문에 정진해 보면 옥석을 가릴 수 있다는 의미로 마감하였다.

본문은 '대학' '중용' '예운'의 차례로 실려 있는데, 다만 예운편 앞에는 ‘禮運大義’란 서설이 하나 더 붙어 있다. 禮運篇은 王肅本에 鄭氏注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 더하여 석곡의 생각을 刷管으로 달아 놓은 형식이다. 내용 가운데는 이른바 ‘大同’이라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대동의 도리란 천하를 공변되게 운영하여 어진 이를 뽑아 모두가 더불어 신뢰하고 화목하게 되며, 널리 사랑하고 존경하여 양보하는 미덕을 갖추어 서로 다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다투지 않게 하는 방법은 禮를 행하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하였다.

전통사회의 세계관이 공간적 인식에 있어서는 다소 협소한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가치추구에 있어서는 오늘날 곱씹어보아도 전혀 고루하지 않게 느껴진다. 오늘날 大同의 의미는 많은 무리가 하나로 합심하여 단결을 이룬다는 다분히 피상적인 의미로 퇴색된 감이 있으나 종교분쟁이나 인종, 민족갈등이 여전하고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재의 세계정세를 돌아다보아도 여전히 유용한 가치가 담겨져 있지 않은가 싶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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