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시대 方證相應 학파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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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시대 方證相應 학파의 형성
  • 승인 2011.07.1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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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마 나오키(平馬直樹)

히라마 나오키(平馬直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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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제1기 국제경방학술회의(2011. 5. 27~ 28 中國 北京) 주요 발표문 요약 Ⅳ (마지막회)

개요

18세기 일본 한방계에서는 중의의 전통이론(음양, 오행, 영기, 운기학설)에서 벗어나 임상에서 나타나는 증후를 근거로 장중경의 방(경방)을 직접 사용하는 이른바 ‘방증대응’ 치료방법을 채택하였다.

방증대응 이론의 역사적 배경은 대외교류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받은 쇄국정책의 영향으로 중국인과의 직접적인 교류에 제한을 받은 상태에서 중의학 고서를 직접 접촉하면서 불필요한 것을 배재하고 실질적인 것을 채택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은 독자적인 의학체계를 성립하였고, 그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강호(江戶)시대에 접어들면서 유학이 점차적으로 불교를 대체하면서 일본사상의 주류가 되었다. 이 시기의 유학 또한 일본의 독특한 환경 내에서 변화가 있었는데, 즉 유학의 복고운동이 출현했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유학경전 문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의학문헌에 대한 연구 또한 유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바로 자신의 사유방식에 의해 「상한론」을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의 방유집(方有執) 등의 ‘착간중정파(錯簡重訂派)’에 의한 새로운 「상한론」 연구가 일본 의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중세 말기~근세 초기의 일본의학

중세 말기 이전까지 한방의학은 아직 사회계층으로 침투하지 못한 일부 특권계급만을 위한 서비스 의학이었다. 중세 말기에 접어들면서 문화가 민중과 각 지방으로 광범위하게 보급되면서 의학계에서 많은 의사들이 배출되었다.

신흥세력 층에서 새로운 宋明시대의 의학을 흡수하였는데, 곡직뢰도삼(曲直瀨道三)을 비롯해서 그의 이론을 추종하는 후학들이 근세 초기의 한방의학의 기준을 만들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 학파를 이르러 ‘후세방파(後世方派)’의학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명대 의학을 종합해서 채용했는데, 이를 자신들의 ‘찰증변치(察證辨治)’교본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명대의 주류학파인 주단계(朱丹溪)의학이 일본의학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근세 초기의 사회상황

덕천가강(德川家康)이 통일 정권을 성립한 강호 막부시대는 바로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변화의 시기였다. 한방의학의 입장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었는데, 일부 특권계급층만을 위한 의학에서 점차적으로 민중을 치료하는 의학으로 변화했고 국민의료의 정규의학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유학의 흡수 및 신조류

18세기에 들어서서 송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한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는데,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의해 유가의 경전을 해석하는 풍토에 반대하고 공자의 원서로 돌아가서 유학을 연구하자는 주장이 일었다. 이것을 바로 복고주의(復古主義)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와 같은 일본 유학의 신조류를 일컬어 ‘古學’이라고 한다.

「상한론」 연구의 시작

이런 추세에 맞추어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서 금원시대에서 명·청시대까지의 의학이론에 대한 의심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사유방식의 이론 중심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증후와 방제와의 직접적인 대응관계를 고려한 것으로 변화한 것인데, 비록 아주 간단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실제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상한론」에 기재되어 있는 방제의 치료효과가 아주 뛰어났는데, 「내경」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상한론」 자체에 이미 처방응용 법칙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당시 임상 의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착간중정파(錯簡重訂派)

착간중정파란 중국의 방유집(方有執), 유창(喩昌) 등이 주장하는 유파로, 「상한론」이 전승되어지는 과정 중에 오자와 탈자 등으로 원래의 의미가 변질되었다고 생각해서 각 경문에 교정본을 첨가해서 각 의가의 관점으로 장중경 처방운용의 본의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방파의 형성

「상한론」의 연구는 이등인재(伊藤仁齋), 적생조래(狄生徂徠) 등이 주장한 중국 고문헌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태도가 단서가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상한학파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방증대응 치료시스템이 탄생하기에 이르렀으며, 머지않아 일본의학의 주류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학만이 고대 중국문명의 높은 수준의 의학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들의 의학을 ‘古方’이라고 일컬었으며, 이전 곡직뢰도삼(曲直瀨道三)이 주장한 당시 중국과 비슷한 성향의 의학을 ‘후세방파(後世方派)’라고 일컬었다.

명고옥현(名古屋玄, 1628~1696)은 일본 고방파의 시작이다. 당시 일본 한의학의 주류인 후세파의 이론적 기반인 금원시대의 철학을 비판하고, 고전인 「상한론」부터 다시 탐독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귀양천음(貴陽賤陰)’원칙을 기본으로 하였고, 치료에 있어서 ‘부양억음(扶陽抑陰)’원칙을 취했는데, 계지와 부자와 같은 온열한 성질의 약재를 많이 사용했다.

때마침 일본은 유학을 숭배하고 주자학이 시대적 주류였는데, 이를 비판하여 유학도 공자의 경전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유학 고방파 출현으로, 주자학을 비판하고 고전을 연구하는 움직임이었다.

후등간산(後藤艮山, 1659~1733)은 이론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지 않았고, 음양, 오행학설과 같은 전통이론보다는 실제 임상에 치중했으며, ‘일기유체설(一氣留滯說)’이라는 병리학설을 주장했다. 삭발하고 승복을 걸쳐야 의가가 되는 관례에서 벗어나 머리를 깎지 않고 장발하고 틀을 올려 그 후 이것이 의원의 풍습이 되었다.

향천수암(香川修庵, 1683~1755)은 후등간산(後藤艮山)의 문하이며, 이등인제(伊藤仁齋)에게 경학을 배워 유의일본설을 주장하여 진료소도 일본당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내경」 「난경」이론을 사파의 학설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고, 금원시대 의가의 인경설과 기미가 약효를 좌우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실증적인 것만 믿었다.

吉益東洞의 등장

길익동동(吉益東洞, 1702~1773)은 의가에서 태어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라는 기본자세를 견지하여 후세파의 음양오행설과 오운육기설 등을 철저하게 공격했다. 그리고 만병은 일독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주장했고, 약도 또한 독이라는 관점이었다.

“독으로 독을 공하, 독이 제거되면 곧 병이 낫는다”라는 ‘만병일독설(萬病一毒說)’을 주장하고 한토하 등 극렬한 약을 사용했다. 또 맥진을 배제하고 “만병은 복완에 그 뿌리가 있다.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복후를 진찰해야 한다”고 복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견해는 일본인의 간결함과 실증을 중요시하는 한방의학 확립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약징(藥徵)」「방극(方極)」 「유취방(類聚方)」이 대표적이다. 「약징」은 고금의 약재 가운데서 53종을 선택하여 그 효능에 대한 종래의 설을 의설이라고 하여 논박하고 본인의 학설을 전개한 것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방극」 「유취방」은 「상한론」 「금궤요략」에서 자신이 체험한 약방을 선택하여 해설한 것이다.

吉益東洞 이후의 발전

길익동동의 학설은 일본 의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상한론」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치유신 이후 정부의 정책으로 전통의학은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20세기 소화(昭和)시기에 들어서서 전통의학은 다시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유화전계십랑(有和田啓十郞), 탕본구진(湯本求眞), 오전건장(奧田健藏) 등이 중책을 맡아 길익동동의 학설을 발굴하고 대중적인 보급에 힘을 썼다. 소화시기의 한방은 길익동동의 방증상응 방법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현재까지도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히라마 나오키(平馬直樹) / 일본중의학회 회장 

<필자 소개>
1952년 일본 가나가와현 (神奈川 縣) 출생. 동경대학 졸업. 의사, 의학박사. 평마병원원장, 일본의과대학병원동양의학과 객원강사. 북리연구소 동양의학 종합연구소의장, 목전(牧田)종합병원 중의진료소 진료부장, 동경위생학원진료소 한방과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중의 임상, 선전 등의 사업에 집중해 왔음. 「대총경절(大塚敬節)」 「시수도명(矢數道明)」 등 저명한 일본의 한방명가들을 스승으로 모셨다.

1988~1989년 중국 중의과학원 광안문의원의 중의내과, 피부과, 종류과 등에서 연수하였고 당시 路志正, 朱仁康, 張作舟 등 중국의 노중의들을 스승으로 모셨다.

저서로는 「中醫學的基礎」 「圖解東洋醫學」 등이 있으며, 이 외에 ‘村井琴山的傷寒論取捨’(「矢數道明先生喜壽記念文集」에 수록), ‘近世漢方醫學的変遷及其背景’(「矢數道明先生退任記念東洋醫學論集」에 수록), ‘中醫處方學入門 1~15’(「中醫臨床」誌 기고문), ‘關於中藥与方剤入門講座’ ‘解說江戶時代各家醫案1~13(연재 중)’(「傳統醫學」誌 기고문)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현재 일본중의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자료제공 / (주)옴니허브 북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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