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17] 임일규 춘천 임일규한의원장
상태바
[한의학은 나의 삶17] 임일규 춘천 임일규한의원장
  • 승인 2003.04.25 14: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환자의 마음까지 보듬는 인술 실천 44년

돈 없으면 아프지도 말라는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한의사로서 면허증을 취득한 이후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해야만 하는 쓸쓸한 삶들에게는 무료진료로 다가서고,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해외 곳곳에서도 의료봉사를 펼치는 등 한평생 한의술의 꽃을 피워오는 한 사람. 온통 사랑과 헌신의 의지로 가득차 있는 임일규(68·임일규한의원) 한의사를 만났다.

한의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왜소한 몸이지만 고운 은빛 머리칼이 흰 가운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임일규원장의 온화한 미소가 먼저 다가왔다. 그런 느낌이 한의사로서 환자를 대할 때 중요한 신뢰감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환자의 아픔은 곧 의사의 아픔입니다. 침 하나를 놓아주더라도 작은 희망을 심어 줄 수 있는 측은지심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더라도 아프면 병원문을 낮춰야죠.”

임일규원장이 한의사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59년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 ‘임성한의원’을 개원하면서부터.

보릿고개 시절이던 당시엔 사실 특별히 의료봉사랄 것도 없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빈민촌이 집중돼 있던 청계천, 행당동, 마장동 등지에서 어떻게들 알았는지 입소문을 통해 무료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던 1969년 성동구 한의사회 회장직을 맡게되면서 그야말로 그의 본격적인 의료봉사 활동은 체계화되고, 정례화되었다.

그는 또 강원도 양주군 사회복지관에서 대학동창들을 동원해 ‘이동한방병원’을 운영하는가 하면, 한의사회의 최연소 분회장으로 ‘청년한의사’의 꿈틀대는 의료봉사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아버지와 조부가 모두 한의사이던 집안 환경 탓에 처음엔 그저 자연스레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좀더 시간이 흐른 후엔 한의사가 되어서 나눔의 사랑, 베품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지금의 경희대의 전신인 동양의학대 한의학과를 졸업했고, 대학시절엔 스승과 함께 교통수단도 마땅치않던 강원도 양양 산골을 찾아가 의료봉사를 하기도 했다.

몸은 힘들고 고됐어도 돌아보면 가슴 가득 흐뭇해지는 뿌듯한 일들이었다. 이렇듯 무료진료는 그가 대학시절부터 부단히도 꿈꿔왔던 일이기에 특별한 자랑거리가 아니라 한의사로서 자연스럽고 또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한다.

지난 1983년 48살이 되던 해 그는 서울에서의 모든 집착과 미련을 접고 가족과 함께 고향인 춘천으로 돌아와 인제, 화천, 횡성, 고성 등지로 보다 분주히 의료봉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렇게 산발적인 봉사를 할 것이 아니라 어느 한곳을 정해 집중적으로 정성을 쏟아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해서 인연이 된 곳이 바로 지난 27일로 임일규한의원과 자매결연 10주년을 맞은 춘천시 남산면에 위치한 방하리마을이다.

“의료취약지인 농촌 주민들에게 한방보건 의료혜택을 주어 농업인과 그 가족이 건강하도록 삶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난 1993년 4월 27일 자매결연을 맺은 것이 벌써 10주년이 되었네요”라며 새로운 감회에 젖었다.

10년동안 임일규원장에게 진료를 받아온 마을사람들은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먹거리를 싸들고 그를 찾아오는 등 우리의 시골 인심이 그렇듯 어떻게든 고마움을 전하곤 했다.

한의사로서 아픈사람을 돌보는 일에는 남녀노소, 지위고하가 따로 없으며 국경도 없는 법.

임일규원장은 한의사로서, 인간으로서 또 하나의 그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국내 무료진료에 이어 의료활동으로서 좀더 넓은 세상에서 공헌할 수 있는 일이 없을가를 찾던 중 우연히 신문지상에 난 ‘국경없는 의사’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자극을 받아 해외의료봉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첫 해외의료봉사 무대는 당시 우리들에겐 조금 낯설던 ‘사할린’. 1995년 환갑을 맞던 해 나이듦에 행여라도 젊은 의사들에게 부담을 주거나 짐이 되지는 않을까 고심하며 망설여하던 그에게 젊은 30대 초반의 콤스타(KOMSTA) 단장은 환한 웃음과 함께 “선생님은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실 겁니다”란 말로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낯선 곳이었지만 정말 후회없는 인술과 의술을 펼쳤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시작된 해외봉사도 모두 13차례에 이른다.

그는 “요즘 젊은 한의사들은 너무 자신들 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에 빠져 있어요”라면서 “무엇이든 관심을 가져야 미래도 있고,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한의사로서, 한국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해외에 나가 열심히 참여해 한국을 알리고, 우수한 인술을 펼쳐 인류에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 해외의료봉사 나갈 시간에 골프나 치러다니겠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한의사로서 겸손과 겸양심이 결여된 일입니다”라며 일부 한의사들의 개인주의를 꼬집기도 했다.

지난 2000년에는 그의 40년간의 의료봉사를 기념하는 화보집을 발간해 후배 한의사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며 인술을 펼칠 것을 당부하는 노력도 쏟았다.

“해외의료봉사는 이제 남의 일이 아닙니다. 더 많은 후배 한의사들이 콤스타단원이 되고, 후원이 되어서 보다 적극적이면서 능동적인 나눔의 마음을 실천할 수 있도록 모두가 함께 힘을 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한의사로서, 의료봉사인으로서의 의지를 견고히 다지기를 바랬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44년째 여전히 정열적으로 왕성한 의료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인생은 아직 저무는 것이 아니다. 따사로운 봄볕에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듯 아직도 한의사로서, 그의 인생에서 경쾌하게 꿈틀대고 있을 따뜻한 사랑이 느껴진다.

춘천 = 강은희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