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네 살, 어느 날의 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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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네 살, 어느 날의 상념
  • 승인 2011.06.3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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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

한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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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졸업반이던 1991년. 졸업을 몇 달 앞두고 난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칭하는 魯迅(본명 周樹人, 1881~1936)의 서간문집인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라는 책을 숙독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은 당시에는 북경여자사범대학의 학생이었다가 훗날 부인이 된 許廣平에게 보냈던 서간문을 모아 출간한 것이었다.

모두가 인지하다시피 중국혁명의 지적 원천으로 추앙받는 周樹人은 이 편지글에서 스스로 “사람들이 나를 혁명가처럼 말하지만 사실 나는 혁명에 앞장 설 용기가 없어서 그저 사다리가 되고자 하였다”고 썼다.

당시 대학 졸업 후 사회진출을 앞둔 나는 이러저런 고민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魯迅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었다. 비겁하게 사다리가 되는 것보다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역사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지 영광된 戰果의 조력자만으로는 영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난 지금 40대 중반이고, 한 대학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민하지 못한 재주와 부족한 학식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자리에 와 있고, 미래의 희망을 짓는 일을 하면서 호구지책을 삼고 있다. 그저 훌륭한 선생님들과 좋은 선배님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자애로운 벗들과 영민하고 성실한 후배님들을 만나서 조우하면서 얻어진 것들이다.

새벽에 깨어있고자 하였으나 주어진 역할에 전일하지 못했고, 현실 한 복판에 있고자 하였으나 결단과 노력이 항상 부족하였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고자 하였으나 교육, 연구, 진료현장 어느 하나에도 빼어난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다.

오늘 아침 7시에는 서울에서 한국의료인교육인증평가기구협의회 태스크포스팀 회의를 하고 경주 진료실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기구는 의학교육평가원, 치의학교육평가원, 간호평가원과 함께 구성한 것으로 오늘 주된 논의는 평가 인증된 의학교육기관의 졸업생들에게만 의료인국가시험의 자격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고등교육법과 의료법을 개정하기 위해 제출된 법안처리에 관한 것과 의학교육 인증 평가기구 국가인정에 관한 건, 그리고 의료인 국가시험 합격선 현대화 방안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난 이 회의에 갈 때 마다 부끄럽고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은 의학교육 분야의 전문가들이고, 의학교육과 교육행정의 학식과 경험이 많은 분들이다. 난 매번 올 때 마다 많은 것을 배워가는 기분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자문에 난 항상 작아진다.

의평원이나 간평원은 1주기와 2주기 자체평가를 마치고 현재 교과부에 고등교육 평가인증 인정기관 신청서를 내놓고 실사 후 KISTEP에서 조언을 받으며 보완 작업 중에 있다. 치평원은 1주기 평가 후 신청서를 작성 중에 있다.

우리 한평원은 지금 이러한 작업을 진행할 역량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 작년에 부산한의전에 대한 평가 작업을 한 차례해본 것 이외에 별다른 평가경험이 없고, 한의학 대학교육에 대한 목표나 비전에 대한 범 학계의 합의나 합의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 못하다.

전국 11개 한의과대학이 충분히 훌륭한 한의사 후배들을 길러내고 있는지에 대한 프로그램 자체 평가를 아직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인 한의학교육의 흐름을 파악하고 선도하고 있지 못하다. 세계 전통의학교육의 선두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우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제 겨우 평가기준을 만들고 평가위원교육을 2년째 수행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TFT에서는 인증평가 활용방안에 관한 토론회와 인증평가 의무화를 위한 토론회를 서울대와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진행한 바 있으며, 인증평가 의무화를 위한 입법청원서를 제출하였고, 국회 교과위와 보건복지 상임위의원들을 만나 설득하기도 하였고, 교과부와 복지부 담당자들을 심포지엄 토론자로 참석시키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법률안을 준비하여 이번 국회에 의료법개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이다. 이번 19차 회의는 이번 임시국회가 ‘반값등록금’ 문제로 이번 사안이 잘 다루어지지 않아서 긴급하게 개최된 것이다.

사실 난 근심이 너무 많다. 가는 곳마다 한없이 부족하고 할 일이 너무 많게만 느껴진다. 분단된 내 조국이 한없이 가엽고 사랑스럽듯이 너무도 부족한 한의계가 더욱 안타깝고 연민이 간다. 회의가 끝나고 서울역에서 경주로 내려가는 KTX 열차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1986년 학교 앞 어느 식당에 걸려있던 글을 떠올리며 이 글을 마친다.

“땀 흘려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수확이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으랴.”

한창호
동국대경주한방병원 한방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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