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일본 동양의학회에 몇 년간 참여한 적이 있다. 거기서 흥행에 성공하는 학회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동양의학회지의 내용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의사 제도가 없는 일본이라고 하지만 진료를 포기하고 학회에 운집한 수많은 참가자들, 모든 발표는 구두로 이루어지며 발표가 끝나면 앞다투어 청중들이 손을 들고 활발한 질의응답 시간을 이어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회의 이 모든 일정이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임상의들이 충분히 며칠의 진료를 포기하고 와서 얻어갈 만한 것이 있겠구나 싶었다. 기회가 되면 일본동양의학회지에 실린 논문제목들과 학회 발표내용들을 소개하고 싶을 정도이다.
미국에 가서도 충격을 받았다. 한의사도 아닌 Ph.D인 연로한 교수님이 한의학의 미래가치를 확신하고 군신좌사의 배합원리를 말하며 한 가지 처방을 10년 이상 연구하고 있는데, 명색이 방제학을 전공한 한의사인 나는 졸업하고 10년이 넘도록 연구자의 길을 걸으며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왜 주위 연구자들을 이 정도로 설득하고 확신시키지 못했는가.
물론 한의사들이 아무것도 안하고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한의학의 과학화를 기치로 삼아 한의학의 치료효능 입증을 위해 몇 십 년간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우리가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필요를 절감해서 한의학의 발전을 위한 연구를 했는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도 이만큼 할 수 있다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학의 흉내를 내기 위한 연구를 열심히 해온 것이 아닐까. 남들이 맞다고 하는 방법으로, 하라는 대로 연구를 하는 것이 우리가 택한 쉬운 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논문은 내부에서도 외면 받으며 우리의 학회는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고 만다.
그 결과 수 십 년의 연구결과들이 남들에게 인정받고 있는가? 그렇지도 못하다. 최근 공무원들과 이야기하던 중 한약처방의 신약개발연구들이 한약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한의학적 원리에 의해 임상시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우리가 해온 “....처방이 래트에서....질환에 미치는 효과” 같은 연구들은 한의학적인 원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의계는 엉뚱한 데 가서 수 십 년간 삽질을 해온 것일까?
이 논리를 우리가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외부에서 우리의 과학적 연구들을 보는 시각을 알 수는 있지 않은가. 더 이상 스스로 관심 없는, 한의학 자체의 필요와 호기심에 의하지 않은, 소위 과학적 연구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동안 우리는 깊은 내면에 비주류의식, 열등감, 패배의식 등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학문은 소통이며 논문은 인용도에 따라 평가받는다. 내실을 다져 한의학의, 한의학을 위한, 한의학에 의한 연구를 해야 할 시점이다.
한의대에 들어온 무수한 젊은 인재들을 더 이상 패배의식에 젖은 비주류의사로 만들어서 내보낼 수는 없잖은가. 그간 한의대에서 배출한 수많은 박사들이 본인의 관심사를 주제로 잡아 연구를 수행하고 학위 후 전문가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한의학은 지금보다 5배는 더 발전하고 10배는 더 풍부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의학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남들의 인정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각과 행동이다.
김윤경 / 원광대 한약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