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54) | 이병모와 이경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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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54) | 이병모와 이경화 (1)
  • 승인 2011.05.1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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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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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대학교의 옌칭도서관 귀중본 서고에 가면 한국 고의서 20여 종을 볼 수 있다. 이 중에 「광제비급」이라는 책이 있는데, 1790년에 함경도에서 간행된 이 책은 단 한번 간행되었을 뿐인데, 중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으며 미국에까지 가 있는 책이다. 그리고 한국 의서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의서이다. 이 책에는 사연이 많다.

1789년 3월 27일 정조는 예조판서로 있다가 홍문관 제학으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병모를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그해 관북지방의 홍수로 인해 흉년이 들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유랑민들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일이 생기자 1790년 2월 그 책임을 물어 파직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왕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지방 관찰사로 파견된 그로서는 함경도 일대의 민생안정에 절대적인 책임을 느꼈을 것이다. 관찰사 이병모가 이경화라는 사람을 만난 때가 아마 이때로 생각된다.

의료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에서 기근과 겹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제대로 된 의료지침서의 보급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을 급하게 써 줄 사람을 찾았고 마침 평안도 출신의 이경화를 소개받았으며, 이경화는 함경도 관영의 관사에서 머물면서 3개월 만에 이 책을 탈고하였다.

이병모는 「광제비급」의 서문에서 이경화에 대해 ‘푸른 얼굴에 눈에는 정기가 있고 경사백가에도 능하며 재주는 많은데 펴지 못하여 의사신분으로 숨어사는 은사’로 묘사하고 있다. 책이 만들어진 다음에 쓴 서문이기 때문에 책 내용이 흡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이 간행된 것은 그해 6월경이며, 그 즈음의 왕조실록은 5월 29일자로 이병모가 유랑민을 안착시킨 기사, 6월 5일 성천강 제방공사를 마친 기사를 싣고 있다. 함경도 일대의 홍수로 유발된 기근과 유민, 전염병 등이 일거에 안정된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이병모는 그해 7월 30일 예조판서로 중앙관직으로 복귀하며 이후 호조, 형조, 병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내다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한 후 1794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후 좌의정을 거쳐 1799년에는 영의정까지 지냈다. 이병모는 1799년 강명길의 저서 「제중신편」을 간행할 때도 서문을 지었다.[김남일,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제중신편」과 「광제비급」은 「동의보감」이 저술된 지 약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 간행된 2종의 대표적인 한국의서이다. 내의원 최고의 의사와 평안도 시골 출신 의사가 서로 다른 배경에서 지은 의서이지만 공교롭게 두 책 모두 「동의보감」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학사에서는 이 시기를 전후해서 「동의보감」식 의학이 조선의학계 최상층으로부터 최하층까지 고루 스며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두 의서의 서문에는 모두 이병모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그가 의학에 얼마나 정통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한의학과 인연이 깊은 인물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차웅석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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