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 인물사 (82) - 尹宗欽 (1910∼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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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 인물사 (82) - 尹宗欽 (1910∼1990)
  • 승인 2011.05.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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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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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당한의원을 이어온 한의사 집안 사람들 ②

 

5대 윤종흠(오른쪽)과 7대 윤영석이 함께한 사진(1988년)
춘원당 한의원의 7대인 尹永錫 박사가 펴낸 「춘원당(춘원당과 한의학 이야기)」이라는 제목의 도록에는 5대 尹宗欽과 손자 尹永錫 박사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1912년에 3대 尹基燦(1848∼1912)이 별세하고, 3년 후에 4대인 尹德(1862∼1915)까지 콜레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어 70여년을 이어온 춘원당 집안은 家學을 이어가기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때 5대 尹宗欽은 겨우 5세의 어린 나이였다.

 

3대 尹基燦의 부인인 양씨는 춘원당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목표를 제일로 삼고 손자 尹宗欽을 평양의 유명한 한의사였던 김춘성 선생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손자를 서당에 보내 한학을 익히게 하였다. 1928년 윤종흠이 18세가 되자 평양에 보내 김춘성에게서 한의학 수업을 받게 하였다. 여기에서 1938년까지 10년간 수련을 받아 의생시험에 합격하여 한의사로서의 길을 내딛게 된다. 합격과 동시에 평양에 ‘춘원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한의원을 다시 시작하니 박골마을에서 춘원당이 문을 닫은 지 23년만의 일이었다.

평양의 춘원당 한의원은 소화기질환과 부인병을 전문으로 하여 크게 유명해졌다. 윤종흠의 치료법은 기존의 처방에 얽매이지 않고 증상에 따라 스스로 立方하는 것이었다. 윤종흠은 연구를 통해 터득한 本草學 지식을 치료에 견고하게 접목시켜 옛 것에 매이지 않는 신처방을 만들어 활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나면서 춘원당 가문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1951년 尹宗欽은 아들 尹容熙와 함께 越南하게 된다. 6대인 尹容熙(1931∼1968)는 平壤醫專에 입학한 수재였지만 공산치하에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체포되어 형무소에 갇힌 몸이었다. 이동 중에 탈출하여 평양 집 근처의 빈집 뒤의 토굴에 은신해 있었는데, 1·4후퇴 때 아버지 尹宗欽과 함께 월남하게 된 것이다.

尹宗欽은 월남한 후에 부산 부평동에 춘원당 한의원을 열었고, 1952년 제1회 한의사 국가고시에도 합격하여 141번의 면허 번호를 부여받았다. 서울로 환도한 후에는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춘원당 한의원을 열었다. 1953년에는 6대 尹容熙가 서울한의과대학(경희대 한의대의 전신)에 입학하여 한의사 집안의 계보를 잇게 된다. 불행하게도 6대 尹容熙는 1968년 교통사고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7대인 尹永錫 박사의 나이가 12세였을 때였다.

尹宗欽은 손자 尹永錫의 어린 시절부터 학문적 스승이었다. 尹宗欽이 손자 尹永錫에게 다짐했던 5가지는 첫째, 한의사가 될 것, 둘째, 아들에게 한의사를 시켜 가업을 잇게 할 것, 셋째, 한의원을 옮기지 말 것, 넷째, 보증을 서거나 남에게 돈을 빌리지 말 것, 다섯째,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이었다.

1978년 尹永錫 박사가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한 이후로 尹宗欽은 학문적 스승으로 임상교육을 시켰다. 본과 1학년 시절부터 시작된 교육은 졸업 후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이후로 윤영석 박사가 춘원당한의원을 맡아서 뒤를 잇게 되었다.

 김남일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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