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53) | 정조와 「수민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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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53) | 정조와 「수민묘전」
  • 승인 2011.04.2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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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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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1월 16일 정조는 사도세자의 탄신일을 즈음해서 매년 행하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역] 성묘길에 올랐다. 쇠약해진 국왕의 건강을 염려하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10살 난 아들의 왕세자 책봉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정조 자신은 “사도세자에 대해서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영조의 유언을 거역할 수 없지만, 정조의 아들은 입장이 달랐다. 정조는 자기 아들이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수원화성으로 물러나 상왕이 되고자했다. 그러면 왕이 된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친할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명분있게 복권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갑자년구상]. 그 아들이 커서 드디어 왕세자 책봉을 받게 된 것이다.

수원화성도 완공되었고, 왕세자 책봉도 결정되었지만, 그러나 이때는 이미 자신의 염원을 실현시켜줄 신하들과의 사이가 틀어져버린 다음이었고, 측근들마저 하나둘씩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 과정을 직접 지켜서서 감독해야 할 본인의 건강도 여의치 않은 상태였다.

결국 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오열하다가 탈진하고 말았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멀리 현릉원이 바라보이는 고개[후일 ‘遲遲臺고개’라고 명명됨]에서 다시 한번 오열하며 쓰러졌다. 그것이 마지막 성묘였고, 11세부터 가슴속에 묻어둔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그해 6월 28일 4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유봉학, 정조대왕의 꿈]

정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2년 뒤인 1764년[영조40년]에 왕세손 책봉을 받은 이후 왕이 되고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정당성을 공공연하게 표방하는 노론계가 주류였던 정국 속에서 지냈다.

왕이 되기도 전부터 자신을 노골적으로 음해하는 신하들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원한을 풀어줄 유일한 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였다.

영조 자신도 왕자시절 신하들과의 알력다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적지 않았고, 게다가 이복형인 경종[재위 1720~1724]의 의문의 죽음도 경험했기 때문에, 영조는 재위기간 철저하게 신하들과의 대결구도에서 지냈다.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영조가 신하들에 보내는 초강력 메시지였던 셈이다. “내가 친아들까지 죽였는데, 감히 너희들이…”

영조의 깊은 뜻을 어린 정조가 알았을까? 1766년경 영조가 병석에 눕자, 그때부터 영조가 운명할 때까지 10여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할아버지의 병수발을 하게 된다. 정조가 지은 「수민묘전」의 서문은 그때부터 정조가 의학에 정진했다고 전한다.

정조가 지은 「수민묘전」에는 그 시절 소년 정조의 애절함과 트라우마가 담겨져 있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동의보감」의 어설픈 패러디라고 우습게 여겼던 오래전의 나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다.

 차웅석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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