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 50 「승정원일기」속의 의학기록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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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 50 「승정원일기」속의 의학기록 ④
  • 승인 2011.03.3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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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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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과 예송논쟁

“藁本과 蔓荊子는 빼지 말라”
顯宗 즉위년[1659] 12월 8일 신하가 “逍遙散을 처방하려고 하는데, 전에 올린 약에서 고본과 만형자는 빼고 貝母 강즙한 것 7푼, 黃連 주초한 것 5푼을 더 넣을 예정이고, 白朮은 전처럼 절반으로 줄여서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현종이 내린 답이다.

「승정원일기」의 의학기록을 보다보면, 그간에 매스컴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현종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시금 보게 된다. 그것은 의원만큼이나 탕약과 침구에 박식했던 현종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약을 먹는데도 그냥 먹는 법이 없었고, 침을 맞을 때는 신하들과 격론도 마다 않았다. 한번은 “그런 雜方은 들이지도 말아라”라고 일갈하기도 한다.[현종 즉위년 6월 17일]

조선왕들 중에 유일하게 국외 출생이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아버지 효종에 이어 조선 18대왕이 되었다. 현종의 재위기간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으로는 예송논쟁이 있는데, 예송논쟁은 사소한 ‘상복입기신경전’으로 비추어질지 모르지만, 조선후기 역사의 새로운 장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중종 때부터 서서히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학자들은 기존의 기득권세력인 훈구세력을 대신해서 점차 정계의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동인서인, 북인남인 하면서 파벌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기존의 훈구세력과는 왕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이들에게서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충성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군자이상사회를 위한 가장 모범을 보여야할 선도자여야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대에 왕이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왕을 바꾸려는 노력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사림세력이 정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부터, 조선왕실의 역사는 왕과 신하들의 갈등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 신경전이 표면으로 부상한 사건이 1,2차 예송논쟁이다.

예송논쟁 1라운드는 갓 왕위를 받은 애송이 왕과 조선사림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송시열(1607-1689)과의 싸움이었다. 결과는 송시열의 압승, 그리고 예송논쟁 2라운드는 15년간의 정치경험을 통해 나름대로 맷집을 키운 현종과 여전히 사림들의 우상이었던 송시열과의 리턴매치이다. 이번에는 현종이 승리, 그러나 현종은 얼마 후에 갑자기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런 아이러니한 정치정황 때문에 현종이 혹시 독살되지 않았을까 의심하지만, 「승정원일기」속의 기록에서 그가 독살되었다는 흔적을 찾아보긴 어렵다. 즉위년 때부터 보이는 패혈증 증세가 재위기간 동안에는 그럭저럭 관리되어 오다가 그 즈음에 심해져서 결국 그 때문에 사망했다는 것이 최근 한 연구자의 결론이다.[이상원, 조선현종의 치병기록에 대한 의사학적 연구]

그 연구자는 현종 재위기간의 질병기록에서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현종의 질병기록은 크게 화병으로 치료받던 시기, 안질로 고생한 시기,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면서 패혈증이 깊어지는 시기로 구별된다. 그리고 화병으로 고생한 시기와 후반기 급격한 체력저하 시기는 거의 1,2차 예송논쟁기간과 겹친다. 신하들과의 알력 속에서 직접 살해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병을 키운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차웅석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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