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81) - 「醫宗金鑑」①
상태바
고의서산책(481) - 「醫宗金鑑」①
  • 승인 2011.03.24 13: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상우

안상우

contributor@http://


淸代 의약문화의 꽃

 

의종금감
史家들은 청대의 태평성대를 논할 때 흔히 ‘康健盛世’를 일컫는다. 康熙로부터 雍正, 乾隆에 이르는 시기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이르는 100여 년간 최고 수준의 학술문화를 이룩하였다. 의학분야에 있어서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으로 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의종금감」일 것이다.

 

총 90권 분량의 방대한 의학전서로 편찬 당시까지의 의서 중에서 가장 완비되고 간단명료하며 전문적인 내용이 실려 있는 종합의서로 평가받았다. 대표 저자 吳謙은 乾隆 재위연간인 1736년 이후 太醫院判이 되었으며, 1740년에 황실의 內府藏書와 전국에서 모아들인 명의들의 家藏秘書를 참고하여 劉裕鐸과 함께 책을 편찬하라는 명을 받고 편찬의 총책임자인 總修官에 임명되었다.

1742년(淸· 乾隆7)에 책이 완성되자 황제가 직접 책 이름을 지어 하사하였는데, 이 때문에 ‘御纂醫宗金鑑’이라 하고 혹은 줄여서 ‘의종금감’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여러 종류의 전문 의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訂正仲景全書傷寒論注 ‧ 訂正仲景金匱要略注 ‧ 刪補名醫方論 ‧ 四診心法要訣 ‧ 運氣要訣 ‧ 雜病心法要訣 ‧ 婦科心法要訣 ‧ 幼科雜病心法要訣 ‧ 痘疹心法要訣 ‧ 種痘心法要旨 ‧ 外科心法要訣 ‧ 眼科心法要訣 ‧ 刺灸心法要訣 ‧ 正骨心法要旨 등 모두 15종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訂正傷寒論注 ‧ 訂正金匱要略注는 吳謙의 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정골심법요지‧종두심법요지 등은 이 책이 나오기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전문적인 치료기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 한의학 분야 특수치료기술의 개발과 저변 확대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 책이 언제 조선에 들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 의서에 활용된 기록은 1798년 茶山 丁若鏞이 펴낸 「麻科會通」에서 처음 찾아 볼 수 있다. 「마과회통」의 抄撮諸家姓氏書目에는 ‘錢謙醫宗金鑑’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저자명은 오겸을 錢謙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마과회통」은 두창과 마진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므로 당연히 「의종금감」의 내용 가운데서 성격상 종두심법요지를 많이 참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위의 책과 鄭氏種痘方 몇 가지 참고서적의 관련 내용을 가려 뽑아 「種痘心法要旨」라는 같은 제목의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엮은 종두심법요지는 1권 1책의 활자본으로 1800년(정조 24)에 간행되었다. 책 끝에는 편자 정약용의 自著인 「마과회통」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은 「의종금감」 중에 수록된 ‘유과종두심법요지’와 정망이(鄭望頤)의 「鄭氏種痘方」을 합하여 다시 개편한 것이다. 편자 정약용의 종두설, 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稿」와 ‘種痘辨證說’, 李鍾仁의 「時種通編」 自序 등에 이 책이 성립된 유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조 24년인 1800년, 다산이 정씨종두방을 박제가에게 보였더니 楚亭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 집에도 內閣藏書에서 초록한 책이 있다며, 그 책을 보여주니 그것이 바로 「의종금감」의 幼科種痘心法要旨였다. 초정은 이에 앞서 1790년 燕京에 사절로 따라가 종두서를 구해와 임금에게 보인 일이 있는데, 아마도 이때 입수되지 않았었나 추정해 본다.

따라서 「의종금감」은 적어도 1800년도 보다 훨씬 이전에 조선에 도입되어 다양한 경로로 조선학계에 그 내용이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회에서는 각 분과별로 그 특징을 상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