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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 한의 상병명, 제2라운드를 준비하자
2011년 01월 27일 () 09:50:03 김기왕 contributor@mjmedi.com

시평

지난 한 해는 새로운 질병사인분류(KCD 5판)가 한의계에 시행된 첫 해였다. 본 시평을 통해 단일 상병명 표기를 지향하는 이 방식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고(731호), 한의계에 몸담고 계신 많은 분들로부터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어찌되었든 한의계는 이 방식을 수용하였고, 이제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한의고유의 병명이나 증명(證名), 즉 이른바 U코드 영역에 배치된 진단명을 사용하는 예는 많지 않았고 적어도 보험의 영역을 보자면 한의사의 진단명은 현대의학의 체계에 포섭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의사도 현대의학적 병명 진단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비록 현재 한의대의 교육 여건이나 진단기기 사용에 관한 법적 제약을 고려할 때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대내외적인 노력을 통해 개선해 나가야 할 문제일 뿐 영원히 병명 진단을 미룰 빌미가 될 수는 없다. 환자에게 예후를 안내하고 다른 의료기관과 호환 가능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또 한의 나름의 변병(辨病) 치료를 위해 병명 진단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병명 진단은 자의든 타의든 이루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증 진단, 즉 변증은 완전히 제도의 바깥에 방치되어 있다. 본 시평을 통해 이미 지적하였듯이 임상 현장에서의 변증 정보 수집은 우리에게 병명 진단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를 제대로 이끌어갈 제도적 장치가 없다.

어떤 분은 국민건강보험의 ‘변증기술료’ 항목을 잘 활용하면 우리 고유의 진단방식을 살려갈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에 책정된 보험료와 실질적 기록 빈도를 보면 이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인 것 같다.

우리의 진단명을 살려가고 그에 관련된 임상적, 학문적 역량을 축적해 갈 방안은 없을까? 여기에 관한 최선의 답은 증명과 병명을 병행 기록하는 것이지만, 이는 이미 좌절되었다. 그렇다면 통계청이나 보험기관의 요구와 무관하게 우리 스스로 우리 고유의 진단명을 살려나갈 방안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즉, 한의진단명 사용을 확산할 어떤 제도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만들고 이를 시행해 보는 것이다. 변증 정보 공유를 위한 하부구조를 만들고 한의사가 의료소비자나 제약회사와 협력할 방안을 구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예상되고 있는 새로운 한약제형의 사용 확대와 맞물려 새로운 지식 피드백 구조를 도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의약 연구개발에 투입되는 예산이나 한의사 회비 수익 등을 변증 정보의 수집을 추동하는 데 투입하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근 몇 십년간 한의계에 일어난 변화들을 살펴보면 그것은 거의 대부분 외부의 요청이나 주변의 영향에 의한 변화였다. 최근의 국가고시 개편, 대학교육평가를 비롯하여 기계 기술의 발전에 따른 탕전 환경의 변동, 심지어는 한의의 주된 치료영역의 변동까지 모두 내부적 동력보다는 바깥의 요구에 의해 그 변화가 추동된 예라 생각한다.

한의사의 권리 신장이나 한의 관련 공적 기관 설치 등 다른 집단도 똑같이 하고 있는 외연 확대의 노력 말고 우리의 내실을 채워갈 독자적인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야말로 변화의 내적 동력을 상실한 집단일까? 이제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 우리 스스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한 번쯤 보여야 할 때가 아닐까? 상병명 개정, 2라운드는 우리가 준비해 보자.

김기왕 부산대 한의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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