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 인물사(69) - 孫師濬(생몰년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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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 인물사(69) - 孫師濬(생몰년대 미상)
  • 승인 2011.01.2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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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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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醫家로 태어나 弱冠 나이에 名醫로 이름 떨친 한의사

 

1999년경 구한말 典醫를 지낸 晴崗 金永勳 先生의 아들 金琦洙씨가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에 기증한 자료 중에 1914년 한국 최초로 간행된 한의학 학술잡지 「漢方醫藥界」가 포함되어 있었다. 朝鮮醫生會에서 간행한 이 잡지는 일제시대 초기 한의계의 상황을 증언하는 각종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이 잡지 앞쪽에 당시 이름을 떨쳤던 몇명의 한의사들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孫師濬과 朴海鎭이라는 두 명의 한의사 사진이 눈에 띈다. 孫師濬의 생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이후의 행적이 모호하기에 다만 이 기록만으로 그의 삶의 일부만을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孫師濬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朝鮮醫生會 評議員 孫師濬君

君은 三世醫家라 年成童에 與其祖로 論醫學 應對如流니 鄕隣이 皆謂之神童이러라. 及弱冠時에 遠近診病者ㅣ 日成市焉니 不獲已開醫業於華川山中이라가 而已오 設病院於春川府고 發明漢藥八十三種야 承江原道警務部認可니 此是明治四十五年事也러라. 噫라. 君이 以妙齡으로 得此於梁楚之間者 不妄語不欺心也而已니 佛子說에 曰信是道源功德母라니라.” (띄어쓰기는 필자 임의대로 함)

위의 글을 통해 孫師濬이 朝鮮醫生會라는 단체의 評議員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朝鮮醫生會는 1912년이 되면 그동안 朝鮮醫士總合所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임원들이 모여서 朝鮮醫學講究會라는 단체를 만들게 되고 1913년 11월 15일에 醫生規則이 공포됨에 따라 朝鮮醫生會라는 명칭으로 단체명을 바꾸면서 만들어진 한의사단체이다. 이 단체에서 評議員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1914년 5월 24일 간행된 「朝鮮總督府官報」 제545호에 그가 醫生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무렵에 醫生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글에서 다음으로 그를 ‘三世醫家’, ‘鄕隣, 皆謂之神童’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한의사의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한의술을 익혀 주위에서 뛰어난 신동으로 칭송받았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는 이미 약관의 나이에 주위에서 이름 있는 名醫로 알려져 있었고 이를 기화로 강원도 화천, 춘천 등지에서 개업을 하여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춘천에서 개업하여 이름을 떨친 시기를 明治 45년 즉 1912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손사준은 한약 83종을 개발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한의학을 발전시켜 실용화시키고자 분발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현대적 모습의 기성한약을 개발하는 것은 한약의 대중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君이 以妙齡으로 得此於梁楚之間者 不妄語不欺心也而已니 佛子說에 曰信是道源功德母라니라”라는 것은 그의 강직한 성격을 말해주는 것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생각이 깊어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같은 잡지에 孫師濬은 본 잡지의 간행을 축하하는 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軒岐遺業, 於斯盛, 蘊古知今, 共濟壽域.”

김남일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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