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 한의학, 실용 학문이면 충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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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 한의학, 실용 학문이면 충분한가?
  • 승인 2010.12.16 13:1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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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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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평

한의학, 실용 학문이면 충분한가?

지난 6월 17일 한국엔지니어클럽에서 인문학자인 서울대 허성도 교수의 특강이 열렸다. 강사 이름과 주최 단체의 명칭을 검색어로 하여 쉽게 강의록을 찾아볼 수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쯤 내려받아 보실 것을 권한다. 발표의 요지는 한국 과학사의 가치에 대한 재조명이라 할 수 있는데, 한 세기가 넘도록 서양문명 앞에 주눅 들어 살던 우리에게는 적잖은 감동을 주는 명강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강의에서 발표자는 우리 조상들의 치밀한 기록정신, 지속 가능한 사회구조 정비 노력과 함께 천문학적, 수학적 업적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그 의의를 전달하고 있다. 중학교 때부터 ‘피타고라스 정리’만을 들어왔던 우리에게 구고(勾股)의 산법은 선조들의 감추어진 면모를 느끼게 하며 그들이 고민한 고차방정식, 다원방정식의 해법, 그리고 삼각함수영역의 문제에 관한 소개는 여러 측면에서 신선한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한국과학사에 대한 연구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인문학자가 아닌 바로 이공계 전공자들임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진심으로 공감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강의록에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 두었다.
“‘조선시대 수학 책 괜찮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만 (중략) 동양 수학의 대체적인 경향이 ‘필요에 의해 가르친다’ 였습니다. (중략) 조선 후기에 와서야 여러 (나름 유명한) 수학자들이 등장합니다. 남병길이란 수학자가 합동방정식의 해법을 소개한 것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남병길 등의 수학자들이 등장하던 조선 후반기에 유럽의 수학은 오일러, 라그랑주, 라플라스, 코시 등에 의해 해석학이 상당히 발전하였고, (중략) 미분기하학마저도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우리나라에서도 삼각함수, 방정식 등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학생들에게도 알려주면 좋을 중요한 사실들이지만, ‘세계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뼈저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글이었다. 오늘날, 한의학을 제외하고는 동양의 거의 모든 과학체계가 서양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외부적 원인도 있겠지만, 내적인 원인으로는 위에서 적은 것과 같이 실용적 목적으로만 학문 활동을 했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 생각한다.

물론 기초과학과 현실의 괴리가 자주 지적되는 오늘날 동양과학의 실용적 태도는 상당한 가치를 갖지만, 지속적이고 원대한 발전을 이루려면 실용적 목적을 넘어선 진리 자체에 대한 탐구, ‘알고자 하는’ 취지에서의 탐구가 필수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런 한계에서 벗어났는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한의학은 우리 학문의 대부분을 ‘방편적 설명의 체계’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기혈, 경락, 장부 등 한의생리의 주요개념이 ‘실제로 자연이 어떠한가’라는 질문과는 무관한, 자의적 설명의 도구로 바뀌었다. 이러한 전략은 ‘한의학은 참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우리 학문을 잠시 도피시키는 데는 성공하였겠지만 더 앞으로 나가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우리가 흔히 듣는 ‘한의학은 발전이 더디다’라는 지적은, 단지 물적·인적자본의 투자가 빈약한 데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전략을 가진 채로는 모든 연구가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그 전략을 바꾸어야 할 때다. 현대 과학과 같이 실체적 설명 모형을 택할 필요는 없겠으나 자연의 실제 모습을 탐구한다는 목표는 확실히 정립해야 한다.

김기왕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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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2010-12-22 13:09:11
말씀하신 대로 '따르는 사람이 없으면' 이런 논의가 의미 없이 묻혀져 버리겠지요. 모든 사람들이 '자연의 실제 모습을 탐구하는 한의학'을 할 필요는 없겠으나 누군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멋있게 보여줘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학교에 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언더그라운드 2010-12-22 11:58:32
취지에는 찬성하나 지향가치로 삼기에는 한의계에 동기부여가 부족해 보입니다. 현 시점에서는 실용성이 한의계의 가장 큰 모멘텀이고 동력입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따르는 사람이 없으면 공론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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