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 ‘전통 한의학’이란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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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 ‘전통 한의학’이란 용어
  • 승인 2010.12.02 16:44
  •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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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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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전통한의학'이란 용어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엮은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이란 책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이 얼마나 허상일 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 우리가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으로 알고 있는 체크무늬의 킬트(kilt) 마저도 18,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홉스봄은 187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유럽에서 국경일, 의식(儀式), 국기 등 ‘전통’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음을 밝혀내면서 이 같은 ‘전통의 창조’가 이제 막 출범한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전통’이 현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일 수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전통 한의학’이라는 용어는 어떨까? ‘정통’이 아니고 ‘전통’이라는 용어를 덧붙인 것을 보면 ‘현대’와의 대비를 의식해서 만든 용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전통 한의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전통시대 한의학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 의학인가? 고려시대 의학인가, 조선시대 의학인가? 「동의보감」인가, 「동의수세보원」인가? 따져보면 ‘전통 한의학’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만들어진 전통’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 낸 용어에 불과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전통 한의학’이라는 용어를 쓰는가? 현대 한의학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전통-현대 이분법을 사용하면 ‘전통 한의학’은 낡고,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낙후된 의학이 되고, ‘현대 한의학’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개혁적인 의학이 된다.
음양오행, 장상, 경락이론을 ‘전통 한의학’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해 버리면 이 이론들은 우리가 버려야 할 낡은 것이 되고, 대신 과학적 지식, 서양의학 지식으로 무장한 한의학은 시대에 부응하는 현대 한의학이 된다.

그러나 이런 전통-현대 이분법이 우리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한다. 애당초 우리가 전통 한의학과 현대 한의학으로 이분해서 사고해야 할 당위성은 없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한의학은 현대화, 과학화, 표준화, 체계화의 길을 걸었고 지금의 한의학은 이런 작업의 결과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한의학은 ‘한의학’일 뿐 전통 한의학과 현대 한의학 두 종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대화, 과학화의 길을 달려 온 지금의 한의학을 두고 앞으로 한의학으로서 고유성을 좀 더 살려나가야 한다는 입장과, 한의학이 의학으로서 보편성을 확보하는데 좀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입장 사이에서 정체성 논란이 있을 뿐이다.

한의계 일각에서 한의학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한의학적 원리에 입각한’이라는 법률상의 단서가 우리의 행보를 가로막는다는 이유다. 한의학이 변했으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우리 스스로의 관점부터 먼저 바꿔야 한다.

‘한의학적 원리’라는 문구를 만들어낸 것도 우리들이고, 이를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해석해왔던 것도 우리들이다. 한 때 이 문구는 한의사들의 영역을 지켜주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했고, 지금도 일정 부분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이제 와 새삼스럽게 ‘한의학적 원리’를 ‘전통 한의학’과 연결시키고 마치 이것 때문에 한의학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몰고 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한의학을 새롭게 정의하려면 먼저 우리들 머릿속에 있는 전통-현대 프레임부터 걷어내야 한다. 우리의 토론이 이념 싸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게 만들려면 말이다.

이충열 / 경원대 한의대 생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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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 2010-12-03 13:46:05
양방에서 자꾸 IMS는 경락학설에 근거하지 않았고 스티렌,조인스는 음양오행,장부론 등과 무관하기에 한의학이 아니라고 하는데..이에'현대적 한의학' 개념을 도입해 음양오행,경락개념이 없어도 한의학범주로 포괄시키려는 경향이 요새 추세 아닌가요?
결론적으로..구체적인 대안이나 의견없이 전통/현대한의학을 구별하면 문제가 있다라고만 하는 저자의 주장은 탁상공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임상교수님들 의견이 궁금하네요)

이충열 2010-12-03 20:57:33
이 글의 논지는 한의학은 한의학일 뿐 전통 한의학과 현대 한의학으로 이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한의학은 지금 우리 앞에 존재하는 한의학, 즉, 현대 한의학 밖에 없으며 우리가 전통 한의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충열 2010-12-03 20:59:11
그러므로 저는 조금 어설프기는 하지만 새로 개정된 생리학 교재에서 한의학이란 “현재, 대한민국에서 국가로부터 면허를 받은 한의사들에 의해 한방병원과 한의원 등 한방 의료기관에서 시행되고, 국가 관리하의 한의과대학에서 교육되고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의학을 말한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충열 2010-12-03 21:00:05
즉, 지금의 한의학은 대략 “전통시대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 고유 의학의 이론과 치료기술을 기초로 하여 이것을 현대에 맞게 현대화, 과학화, 체계화, 표준화한 그리고 이 같은 작업 과정 중에 있는 의학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충열 2010-12-03 21:00:50
그러면 왜 전통 한의학이란 용어가 문제가 됩니까? 우리가 전통-현대 이분법을 통해 한의학을 바라볼 때는,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음양오행, 장상, 경락 등을 ‘전통 한의학’에 속한다고 취급해 버리면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대 한의학’에서는 이 이론들이 설 자리가 없으며 반드시 버려야만 하는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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