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53)- 申佶求(189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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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53)- 申佶求(1894∼1974)
  • 승인 2010.09.1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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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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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본초학 금자탑 쌓은 한의약학자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 현대까지 한국 본초학의 금자탑을 쌓은 申佶求는 한의학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꼽힌다. 1894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보성중‧고교를 나와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중퇴하고 日本 早稻田大學을 유학을 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10년 가까이 金永勳에게서 本草學을 전수받고 1928년에 한약업사 허가증을 취득하였다.

이후 한약에 대한 그의 연구는 각종 활동을 통해서 나타난다. 1937년에 경기도의생강습소에서 강사로 본초학 강의를 시작한 후 1940년에는 동양의학강습소 강사, 1942년 조선생약통제주식회사 기사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 이후인 1948년에는 경희대 한의대의 전신인 동양대학관의 교수를 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약에 한해서는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연구가 없을 정도였다.

申佶求의 학술을 집약한 책은 <申氏本草學>이다. 1972년에 초판이 간행된 후로 판을 거듭하면서 刀圭界의 필독서로 현재까지도 읽히고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晴崗 金永勳의 ‘神農遺績’이라는 祝文이 기재되어 있다. 이 책은 그의 본초학에 대해 가졌던 경험과 학술연구를 집약한 것으로 평생의 역작이다. 이 책을 내면서 申佶求는 自序에서 다음과 같은 감회를 피력하고 있다.

“원래 나는 淺見薄識하여 그 重任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다만 40여년 간 여기에 心血을 경주하여 古典을 涉獵하고 연구한 것을 記述하여 本草學이라는 학문을 확립하고자 하는 微衷에서 감히 講壇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講義內容을 修訂增補한 것을 이에 刊行하는 바이다. 물론 杜撰도 있을 것이요, 錯誤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後學의 硏究를 위한 礎石이 되었으면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물론 完成品이라고 할 수 없다. 마치 家屋을 건축하는데 있어서의 上樑과 같다. 많은 叱正과 엄정한 비평이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 바이다.”

한국 본초학 금자탑 쌓은 한의약학자
본초 관련 기고 왕성…학술 논쟁 유도


이 책은 본초의 기원에서부터 연혁, 범위, 명칭, 기원, 성상, 성분, 군신좌사, 용약의 대법, 복용약재의 종류, 응용 범위와 약물학적 작용 등을 기록한 총론과 약물 각각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각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물의 구분은 補氣助陽藥, 補血養陰藥(이상 補養의 藥類), 收斂血管藥, 收斂精氣藥(이상 收斂藥), 發散風寒藥, 發散風熱藥, 發散風濕藥, 發散寒濕藥(이상 發散藥), 通利淋濁藥, 淡滲水濕藥(이상 滲濕藥), 催吐痰涎藥, 催吐毒物藥(이상 催吐藥), 瀉下熱積藥, 瀉下寒積藥瀉下水飮藥(이상 瀉下藥) 그리고 宣肺潤氣藥, 通氣行滯藥, 行氣通竅藥 등으로 하고 있다.

일제시대 30년대, 40년대에는 주로 <忠南醫藥>, <漢方醫藥> 등의 학술잡지에 글을 올려 학술적 논의를 촉발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대체로 약물에 대한 품평이 위주가 되지만 간간히 한의학계에 경종을 올릴 수 있는 글들도 다수 발표하였다.

해방된 이후에도 그의 활동은 이어졌다. 동양의약대학의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면서 각종 학술잡지에 본초에 대한 글을 연이어 기고한 것이다. 그의 글은 1947년 창간된 <東洋醫藥> 창간호를 시작으로 1955년 창간된 <東洋醫藥>과 <東方醫藥>에까지 연이어 나온다. 특히 1954년 裵元植에 의해 창간된 <醫林>에는 수많은 학술논문을 게재하여 학술 논쟁의 선봉에서 노력하였다.

金南一/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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