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139] 算學啓蒙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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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139] 算學啓蒙①
  • 승인 2003.04.1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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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 譯, 算 雜科의 동반자

그림설명-조선판 『산학계몽』

과거시험에서 이른바 雜科의 대표로 醫, 譯, 算을 일컫는데, 시대에 따라 律科, 曆科, 陰陽科, 雲科 등을 병칭하기도 했다. 算科 출신자는 관의 재정, 회계 사무에 종사하였으며, 그들은 籌學 혹은 計士, 算士라 불리었다. 算學은 산술에 관한 학문제도로 문헌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이미 통일신라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산학박사 또는 조교 한사람으로 하여금 『綴經』, 『三開』, 『九章』, 『六章』을 교수시킨다고 하였다.

고려 때에는 신라의 산학제도를 이어받아 중앙관서와 外職의 관아에 모두 50인 가량의 算士가 배치되었는데, 다른 기관들에 보통 1인만이 배치된 것에 비해 尙藥局에는 軍器監이나 大倉署와 함께 2인이 배치되었다. 이것은 약재의 수급이나 香草의 유통이 빈번하여 회계사무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공양왕 원년에 十學敎授官을 설치하는데 醫學은 典醫寺에 둔 반면에 算學과 譯學은 빠져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회계관리의 적임자가 부족하고 산사의 양성이 시급하다는 호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세종12년(1430)에 사역원 주부 두 사람을 명에 보내 수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아울러 국왕 자신도 스스로 부제학 鄭麟趾로부터 『산학계몽』에 관한 강의를 받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이어 같은 해에 제정된 雜科十學 과정 중에 산학에는 詳明算, 楊輝算, 啓蒙算, 五曹算, 地算의 다섯 敎科로 되어 있는데, 앞의 세 가지 책은 經國大典의 算科 取才書로 올라있는 산학교과서이다.

『산학계몽』은 조선 算學의 핵심을 이룬 중요한 算書인데 그 내용을 보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여 香料와 藥草, 귀금속 등의 거래에 관한 문제를 곳곳에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원작자인 元의 朱世傑은 ‘周流四方하기를 20여 년만에 廣陵 땅에 다시 돌아오니 그를 찾아 배우기를 청하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하는 당대 으뜸가는 인기 수학자였다. 이렇듯 이름난 민간 수학자였던 그는 算木에 의한 高次方程式의 해법인 天元術을 한층 더 발전시켜 四元의 고차방정식을 다룬 『四元玉鑑』(1303)을 지었다.

기본적으로 송의 화폐경제에 의한 상업발전을 반영한다고 하는 이 수학서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99년에 처음 간행되었다. 이 책이 어떤 경로로 고려에 전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간행된 지 3, 4년 후에 崔誠之가 왕명을 받아 중국에서 授時曆을 연구한 뒤 돌아오면서 曆書와 함께 들여온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세종 치세 무렵에는 이미 그 내용을 충분히 터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詳明, 楊輝, 啓蒙으로 이어지는 교과목은 차례대로 서술방식이 차츰 간결해지면서 동시에 내용 면에서는 점차 심화되는 과정으로 이들 교과서의 채택이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이 책은 중국에서는 明代에 이미 逸失되어 그 존재조차 잊혀진 채로 지내다가 나중에 淸朝의 학자인 羅士琳이 조선판을 얻어서 復刻(1839)하게 될 때까지 수백 년간 그 내용이 그늘 속에 파묻혀 지내왔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60여 년 만인 顯宗元年(1660)에 全州府尹 金始振이 이 책을 重刊할 때 지은 서문에는 그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여태 남아있는 算書는 『詳明算法』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우연히 金溝縣令 鄭瀁에게서 『양휘산서』의 초본을 얻었고 이번에 또 다시 地部會士 慶善徵에게서 『산학계몽』의 國初印本을 입수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國初印本’이란 세종 시대에 발간된 것으로 집안 대대로 籌學 출신이었던 慶氏의 家傳本이었다고 한다. 책 내용은 다음 호에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02)3442-1994[204]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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