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15] 임준규(한방재활의학과학회 초대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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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15] 임준규(한방재활의학과학회 초대학회장)
  • 승인 2003.04.1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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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치료의 다양화 길 튼 병원행정의 달인

사진上-임준규 선생 / 사진下-대한한방병원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임준규(뒷줄 오른쪽 끝) 선생.

한방재활의학과학회 창립이 햇수로 20년이 됐다. 사람으로 치면 학문 세우기에 몰두할 나이지만, 비교컨데 재활의학과학회는 전문의과로 지정돼 일단은 한의학의 일정한 영역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한방재활의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열어놓은 인물이 초대학회장인 임준규 선생(71)이다.

임준규 선생은 한방재활의학과학회(당시 한방물리요법학회)를 창립한 첫 번째 회장이기도 하지만, 최초로 한방병원에 한방물리요법실을 만들기도 했다.

◆ 만학도 출신 한의사

32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한 임 선생은, 집안이 몰락함에 따라 고학으로 대학교육을 마치고 부산 기독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재직했다. 이 때 그의 나이 27세, 당시 사형선고라 인식됐던 간디스토마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터에 자연의학과 관련된 일본책을 손에 넣게 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책에 적혀있던 요법들을 차근히 실행해 병이 나은 뒤로 자연의학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 38세의 나이에 한의사가 됐다.

병리사로 재직했던 임 선생은 서양 병리학 지식을 겸비한 한의사로서 졸업직후 경희대 동서의학 연구소에 들어갔고, 한방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 한방치료의 다양화를 위해

72년 경희대 한방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할 당시, 병원에는 중풍환자들의 비중이 컸다. 하지만 한방병원으로 오는 많은 중풍환자들도 모두 양방으로 돌려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들의 재활을 위해 한의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침과 뜸뿐이었기 때문이다. 한의학의 치료효과를 구현할 실제적인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한의학적 치료관을 바탕으로 다양한 물리치료를 시술할 수 있는 자연요법실을 만들었다. 74년 한의학의 개념을 부각시키기 위해 한방물리요법실로 명칭을 변경하고, 한방물리치료내용을 구성하는 텍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을 책으로 낸 것이 ‘동의자연요법대전(77)’이다.

76년 경희대 한의대에서 한방 물리요법학을 설강했고, 자연요법을 한의학 전문과목으 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양방의 기기들을 이용한다는 이유로 의사들로부터 항의를 받았지만 “한의학 이론을 근거로 한 치료는 한방의 영역”이라는 소신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84년에 현재활의학과학회의 전신인 한방물리요법학회의 초대회장으로 학회를 일구었다.

◆ 임상교육과정의 틀 확립

82년 경희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직후 임 선생은 대전대 한방병원의 초대 병원장에 이어, 경산대·우석대의 병원장을 역임한 병원행정의 노장이다.

대전대 병원장 시절, 후발로 한의대 병원의 설립이 줄을 이었지만, 임상교육은 막 시작되는 단계였다. 따라서 수련의들을 훈련시킬 교육내용 및 체계가 없어 교육자나 학생들 모두 혼란을 겪는 시기였다. 병원장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한의학의 임상교육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86년 전국 한의대교수협의회에서 임상교육에 대한 카테고리를 발표했다. 9년 뒤에는 전국 대학 한방병원장들로 구성된 임상교육협의체를 출범시켜, 일반수련의 교육과정을 만들고 교육협의회에 인준을 받아 체계를 확립시켰다.

◆ 병원, 한의학의 구현 현장

우석대에서 퇴임을 맞은 그는 대전 성심한방병원장 및 분당 차한방병원장으로 재직했다.

평생 대학교수로서 강단에 서고, 병원장으로 임상수련의 교육과정을 확립시키는 등 그의 행로를 통해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늠케 하지만 그는 유독 ‘대학 병원장’으로서의 호칭에 애착을 보였다.

“학생과 동시에 많은 환자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환자들에게 생식요법, 기공요법, 풍욕 등을 처방했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의사의 몫이 30%, 나머지 70%는 자신의(신체) 몫이라는 자연 치유력에 대한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요법은 한의학과 다름 아니며, 오히려 한의학의 본질을 끄집어내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생각이다. 자연요법과 아울러 동서협진의 가능성에도 주목하여, 임상에서 활용방안을 모색·연구한 ‘동서의학협진과 임상실제(1995·한성사 刊)’을 내 기도 했다.

◆ 시대와 교류해야

절실한 기독교신자인 임 원장은 3년전 전북 남원에서 의료선교활동을 벌이던 중 중풍으로 오른쪽 시력을 잃고 거동이 불편해 졌지만, 현재는 한의학과 자연요법 등 관리를 통해 다소 호전된 모습으로 돌아와 오래도록 친분을 맺어온 환자들이 방문하면 치료를 마다하지 않고, 고을빛생식 자연의학연구소 원장으로도 재직하고 있다.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한의학은 시대와 교류해야 한다”면서 예방의학이 부각된 ‘프라이미얼 헬스케어’의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현대의학의 한계를 대체할 수 있는 한의학의 강점을 발전시킬 수 있는 해결방안이라는 것이다.

시대와 교류해야 한다는 유연한 사고로 자연요법과 동서의학에 대한 확장된 시야를 형성하고, 이것은 재활의학과 창설 및 임상교육체계 확립과 무관치 않게 보여진다.

한편, 대중에 한의학 및 자연요법에 대한 강연 및 교육에 전념하겠다는 열정을 보였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2남1녀를 두고 있으며, 장남 임종원(43·서울 동승한의원) 씨가 대를 잇고 있다.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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