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0] 一松 朴性洙 회장(下)
상태바
[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0] 一松 朴性洙 회장(下)
  • 승인 2003.04.18 17: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초기협회장시절, 한의사제도 안착시켜

사진설명-1955년 서울시 한의사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일송 박성수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5번째).


한의사제도를 위하여

54년 보사부장관으로부터 한의사국가시험위원으로 위촉받은 일송은 당시 한의사의 수효가 다른 의료단체와 비교했을 때 너무 적어 회무활동의 열세를 면치 못한다고 판단, 질도 중요하지만 수를 늘리는 문제도 시급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의 노력으로 그 해 국가시험에 상당수가 합격했다.

국민의료법에 따라 52년 부산에서 한의사협회결성총회가 열려, 이익룡 초대회장단이 결성됐다.

이 때 일송은 이사로 선임됐다. 하지만 53년 협회가 서울로 이전 돼, 사실상 서울시한의사회가 중앙회의 역할을 수행했고, 실질적인 운영도 당시 서울시한의사회장이었던 일송이 맡게 된다. 2대 회장에 이익룡 회장이 연임되고, 일송은 부회장에 오르지만 당시 이 회장이 부산에 개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송이 회장직무대리를 수행해 나갔다.

56~63년 일송이 3·4대 회장에 선임된 기간은 중대한 과제가 산재해 있었다. 4·19, 5·16 등 사회적으로 혼란한 배경이었고, 협회 초기시절인 만큼 조직이 취약하고 회비의 징수도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 보사당국의 한의사에 대한 몰이해와 형평을 잃은 편파적 행정 등이 악재로 작용했다.

이러한 가운데, 초기 일송은 한약재의 수입완화 건의, 보사부내의 한방과 설치 건의, 한지한의사제도철폐운동 등의 주요사업을 추진했지만 반영되지는 못했다. 협회가 난항을 거듭하자 일송은 대한한의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사단법인체로의 조직개편을 제안하고, 이 안건이 수용됨에 따라 사단법인체에 필요한 정관을 새로 제정하는 등 필요한 제반사항을 단행했다.

59년 12월 1일 사단법인 대한한의사협회로 거듭나게 됐다. 어려운 와중에 한의사제도의 폐지론과 의료유사업자령이라는 큰 시련이 겹쳐지게 된다.

한의사제도폐지론이 대두되면서 일송은 보사부장관을 방문하고, 의료법개정에 있어 한의사제도의 필요성을 역설, 청원서 및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생사기로에 선 한의계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의료법 중 한의사제도를 삭제시키는 위기까지 몰렸지만, 결국 박 회장을 중심으로 집결 된 한의계는 한의사의 법적지위가 확보된 신의료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른다.

이로써 한의사제도는 제도권 안에 안전하게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일송이 대한한의사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서울시 한의사회장을 역임했던 최규만 선생은 당시 회고에서 일송을 가리켜 “부산에 있던 중앙회를 서울로 끌어올렸고, 검정시험제도로 후진을 많이 배출시켰으며 의료단체 중 최초로 정관을 만들어 지방의 회원들도 회비를 잘 납부하게 해 협회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등 협회육성에 크게 이바지하고 회운영에 자신의 사비도 많이 들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통문화·유림의 전통

전통적인 유학자인 일송은 57년과 61년에 우국노인회와 한국노인회의 회장직을 역임했다. 4·19 이후인 60년 전국적인 유도회를 조직, 자신이 직접 서울 본부위원 장직을 맡아 2년간 활약했다.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1976, 1978년 두차례에 걸쳐 7·8대 성균관장(임기 2년) 을 역임해, 유림문화를 계승 해 나갔다. 78년 성균관장 재임시절 동성 동본 결혼 인정론이 나오자, 일송은 반대운동을 전개해 전국의 유림들은 총궐기에 돌입했다. 결국 국회에서 이 안은 철회됐다.

한시에도 뛰어나

한편 漢詩실력이 뛰어나 일송의 명성은 자유중국에까지 알려졌다. 73년 대만에서 제2차 세계시인대회가 열린 당시, 한국측 참가자로 일송과 동행했던 信齊 이수원 씨는 당시 대회장에 들어섰을 때 대만정부의 장관들과 시인들은 일제히 기립, 열렬한 박수로 환영했는데 마치 공식의전행사에 국빈환영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었다고 회고했었다.

이미 시인대회가 개최되기 10년 전인 62년에 일송은 그의 한시에 대한 명성으로 자유중국의 학회고문으로 추대됐 다. 74년에는 사단법인 한국한시협회를 조직, 회장겸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일송은 박씨 문중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63년 신라오릉보존회를 조직, 부회장에 선임됐으며, 70년부터 밀양 박씨 규정공파 대종회 회장직을 8년간 지냈다.

한의학과 한국문화 전도사

그의 일련의 업적에서 한의사 협회의 초기 제도화를 위한 투쟁·한방의 산업화 뿐 아니라, 유림의 전통을 잇고, 문중사업 및 한시에 열중했던 모습은 한의학과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으로 비춰진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애정을 근간으로 운신의 폭, 활동영역이 결정됐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대외적인 한시조직에서의 활동에서 나타나듯 비단 국내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송의 손자인 박종환 씨(조선무약합자회사 경영정상화 위원장)의 “솔표 우황청심원이 일본에 수출되는 데는, 조부가 일본에서 한의학에 대해 한 강의를 듣고 일본인들이 신뢰를 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설명에서 한방제제의 대일수출이라는 사업적 성과가 단순히 경영적인 측면 뿐 아니라, 민족문화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반증한다.

92세를 일기로 永眠

일송 박회장은 89년 92세로 일기를 마쳤다. 그가 경영일선에 있을 당시 재직했던 조선무약의 한 임원은 “강직한 성품인 반면, 주위 측근에게는 상대를 배려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면서 “많은 연세에도 아침에는 꼭 30분 가량 기체조를 한 후, 일요일도 없이 8시에 출근했다”고 말했다.

그의 장례는 전통유교식에 따라 치러졌고, 전국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조선무약의 실제적인 경영을 맡고 있는 박종환 씨는 현재 회사가 어려운 상태에 직면했으나 “창업주인 조부가 품었던 한방의 대중화·산업화 발전이라는 정신을 계승, 시대에 맞춰 세계화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진아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