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8] 素軒 鄭源熹 선생(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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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8] 素軒 鄭源熹 선생(上)
  • 승인 2003.04.1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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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제도화 이끈 오인동지회의 핵심
한양방 이원제 국민의료법 통과 중추적 역할

사진설명-한국의약회가 국회의원에 보낸 건의서

현재 1만여 한의사가 활동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은 한의사제도가 포함된 국민의료법 통과일 것이다. 이것은 우연히 얻은 결과물이 아니라 오인동지회를 중심으로 입법투쟁한 열성적인 노력의 대가였다. 그중에서도 최연소로 가장 마지막까지 한의학의 의권수호를 위해 전념했던 소헌 정원희 선생의 역할이 컸다.

26세에 한의학 입문

소헌 정원희 선생은 1914년 7월 14일 부산 구포에서 출생했다. 2남3녀 중 맏이였던 그는 가업을 따라 부친 혜련 정태호 씨가 개원했던 혜련한의원에서 한의학을 수련했다.

25세에 한약종 시험에 합격했으며 1940년 26세에는 의생시험에 합격해 경남 창녕군 이방면에서 인제한의원을 개원해 진료에 입문했다.

1946년 부산시 중구 부평동으로 이전 개원한 정원희 선생은 다음해인 47년에 경남 동양의약회 부회장을 맡게 된다.

이는 경남 의생 회장이자 경남동양의약회 부회장인 부친 정태호 씨가 58세의 나이로 영면하자 아들 정원희 선생이 후임 회장에 선임된 것으로 경남동양의학회는 해방직후 부산에서 한의학의 획기적인 발전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소헌 선생의 아버지 혜련은 3.1운동 참여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항일투사이자 의생으로 소헌 선생은 아버지를 ‘범인이 따를 수 없는 명의요, 도덕군자요, 혁명가’라고 표현할 만큼 존경했다.

가훈 또한 ‘인간은 양심을 지켜야 하며 나름대로 국가사회에 봉사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로 선생이 향후 한의학의 의권 수호를 위해 불철주야 뛰어 다녔던 것은 그의 가풍에서 배어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오인동지회 결성

1950년 피난 국회에서 국민의료법제정 논의가 제기돼 의사 단독법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안 한의약계에서는 한방을 제도적으로 살려야 하겠다는 의지로 오인동지회를 구성해 입법투쟁에 나섰다.

당시 한의학이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점에 놓였으나 한의계 발전을 위해 발족됐던 경남동양의약회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정원희 선생은 궐기격서를 작성해 동지규합에 나서게 된다.

이에 소헌 선생을 포함한 이우룡, 우길용, 윤무상, 권의수 등 5명은 오인동지회를 결성하고 단체적인 추진력을 가질 수 있는 한국의약회를 발족시킨다.

최연소였던 그는 예리한 판단력과 출중한 문필력으로 전략과 자료작성을 담당해 이원제 국민의료법이 제정되기까지 오인동지회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한편 제2대 국회가 첫 소집된 초기 동양의약회 신세균 회장과 부회장 정원희 명의로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원하는 한·양醫가 공존하는 동등권의 이원제 의료법은 결단코 제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국회의원 전원에게 전달했다. 이후 신세균 회장이 개인사정으로 회장을 사임하자 소헌은 회장직을 대행하게 된다.

국민의료법 통과 기여

당시 입법부와 행정부에 한의 출신은 하나도 없는 인부족세부족 처지에서 양의는 韓醫抹殺 新醫單行法을 주장했지만 오인동지회는 국회 사회보건분과위원회에 증언신청을 제출해 개회석상에서 정원희 선생을 비롯한 윤무식, 권의수, 이우룡 등 4명이 증언을 하게 된다.

소헌 선생은 ‘한의학을 비과학적이라 하며 마치 가치 없는 의학으로 평가하려 하나 그것은 중대한 착오다, 한의학의 후진성을 비난하나 그것은 잔학 편견이 소치다, 한의제도를 국제 체면 손실이라고 하나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이냐’ 하는 내용을 논리정연 하게 증언해 국회의원들을 감동시켰다.

그 결과 재석 116중 가 61, 부 18표로 본회의 상정 수정안을 통과시켜 한의제도 존치를 위한 첫관문을 통과시키게 됐다.

그러나 신의출신 의원과 보건부는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라느니, 서구 선진국에도 없는 제도라는 등 한의학에 불리한 증언을 했다. 이때마다 소헌은 해명서, 성명서, 반박문 등을 일간지에 게재해 국회의원의 정의양심에 부단히 호소해 마침내 본회의에서 한의양의 동등권의 이원제 국민의료법이 통과된 것이다.

때론 이웃집 아저씨같이

소헌 선생은 쾌활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당질인 정홍교 원장(69·부산 혜생한의원)은 “당숙의 그런 성격 때문에 한의계를 위해 정치적인 일에 많이 관여해 일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국민의료법 통과 당시 중학생이었던 정홍교 원장은 당숙이 한의계 의권수호를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뛰어 다녔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또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열정적이고 성실한 그의 활동에 대해 부친 정태호 씨가 종종 야단치는 것을 보았을 정도라고 했다.

오인동지회에서 필봉을 맡았던 소헌 선생은 국회 증언서, 대정부 진정서, 궐기문 등을 일일이 붓글씨로 써서 중학생 조카(정홍교)에게도 큰소리로 직접 읽어 주며 의견을 묻고 “젊은 사람 생각에도 맞는 것 같냐”며 재차 확인했다고 한다.

반면 바깥일에 냉철하고 열성적으로 활약했던 정원희 선생은 한의원에 들어서면 따뜻하고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로 180도 변했다고 한다.

그는 85년 71세로 작고하기 직전까지 환자를 보았다. 정 원장은 “한의 수호를 위한 바깥일에는 정열을 다해 날카롭게 추진하다가도 진료를 할 때는 더없이 온화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부인 양단숙 여사 사이에 4남3녀를 다복하게 두었지만 자식 중에 한의사의 길을 걸어준 사람이 없어 아쉬워했다는 소헌 선생은 바깥일에 충실한 나머지 가정에 소홀했지만 환자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인자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 계속 >

양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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