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7] 斗庵 韓東錫 선생(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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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7] 斗庵 韓東錫 선생(下)
  • 승인 2003.04.1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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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根株 파고든 대가


우주변화의 원리

선생의 저서는 ‘宇宙變化의 原理’와 ‘東醫壽世保元註釋’ 두 권이다. 66년과 67년 두해에 걸쳐 한 권씩 발간한 것이다. 짧은 기간에 나온 책이라고 해서 한번에 쓴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선생은 틈틈이 원고와 자료를 챙겨 계룡산으로 들어가 목욕재계하며 준비했다.

선생은 이 책의 의미에 대해 대한한의학회지 광고문 중 저자의 말 중에서 “우주도 변화하고 인간도 변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살필 줄 모른다. 이 원리를 계발하여 놓았지만 인간이 그 根株를 파헤치기는 진실로 어렵다. 필자는 내경을 연구하는 학도와 우주의 신비를 개발하려는 후학들에게 그 안내의 역을 다하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세상에 내보려는 바이다”라고 운을 떼고 “평이한 말과 쉬운 문장으로 엮음으로써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는 데 노력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생의 글은 광고문안과는 달리 그 내용이 무척 난해한 것으로 소문났다. 그 때까지의 이론들을 부정하고 새롭게 정립한 학설들이 많지 않아 이해하는 이가 적었을 뿐더러 지금도 이 책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오행개념의 質量선생은 變化, 五行의 變極, 對化作用, 土化作用, 寅申相火論, 金火交易論, 精神論, 本體論 등은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이론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동의수세보원도 註釋

‘東醫壽世保元註釋’이란 책은 ‘宇宙變化의 原理’보다 1년 뒤에 나왔다. 선생은 이 책이 이해되지 않으면 ‘우주변화의 원리’를 먼저 공부하고 나서 다시 이 책을 공부할 것을 머리말에서 권하고 있다.

두암 선생은 머리말에서 이 책이 동무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 해설서로서 모든 질병의 변화는 체질의 특성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한 동무의 원리를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처방에 대한 입방원리를 밝혀 놓음으로써 누구든지 동무의 입방원리와 인간생리의 특수성을 알고 처방을 운용할 수 있게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이 책은 선생이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한 그 사상적 기반을 토대로 이제마 선생의 ‘동의수세보원’을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한의학 무시하면 불같은 호통

선생은 양방의사나 양약사들이 한의학을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나 지면을 통해서 준엄하게 꾸짖고 한의학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던 1960년대 한의학의 위상과 자존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어느 날 어떤 환자 가족이 한의원으로 찾아왔다. 자신의 오빠가 신장결석으로 신촌의 모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수술할 것을 권유하여 수술하기 전에 한방으로 할 방법이 없나 찾아온 것이다. 내용을 들은 선생은 다짜고짜로 “왜 수술해. 멍텅구리나 수술하지. 腎장속의 돌이 뭐야, 金氣지. 거기에 불을 넣으면 다 녹아”라 하였다. 그래서 진맥을 하고 한약을 몰래 먹은 결과 X-Ray상에 結石이 없어진 것이다. 그제서야 환자가 전말을 털어놓았다. 그 사실을 안 병원 양의사가 선생에게 전화를 해 불손한 말투로 병원으로 와보라고 하자 선생은 “결석 하나 고치지 못해 칼로 째는 백정새끼가 어디다 대고 와라 가라야. 요놈 새끼. 우리 집에 기어와도 내가 너를 대할랑 말랑 해. 에이 상놈”하며 소리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선생의 불같은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그렇다고 무작정 양방의사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열고 진지한 학문적 토론을 나눌 수 있거나 양방의료의 한계를 인정하고 허심탄회하게 다가오는 사람이면 한방 양방을 가리지 않고 깍듯하게 대해주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왕진을 갔는데 으리으리한 저택의 대문을 놔두고 집뒷편 골목으로 난 쪽문으로 인도하더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환자의 남편이 사회적으로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내과전문의는 자신의 집에 한의사가 들락거리는 것을 남들이 알까봐 창피하고 두렵게 생각한 것이다. 완쾌된 다음 그 내과전문의가 찾아와 선생에게 명의라면서 감사를 표시하자 선생은 “부인을 치료하는 동안 차도가 있음을 감지하고 계속 맡겨 준 내과전문의 당신이 명의”라며 공을 양의사에게 돌리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 뒤 두 사람은 밤이 늦도록 술잔을 나누며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프로기사 김수영의 ‘바둑 이야기. 나의 스승 조남철’에 나와있는 이야기다.


寄稿와 講演에도 열심

선생의 학문의 깊이와 올곧은 성정은 각종 기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12월 22일 동아일보에 쓴 글 ‘한의사가 본 의료법개정-김두종씨의 논문을 보고’라는 글을 인용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체라는 정신과 육체로 화합된 유기체적 종합적인 생명체를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구명하려 하거나, 또는 원소분석에 의한 약물만으로 치료하려는 양의학의 입장은 인간을 완전히 파악못한 소치인 것이다…순전히 과학적인 의학을 가지고는 인간의 정신(形而上) 분야를 완전히 개척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선생은 부산의 동양의학전문학원에서부터 많은 이들을 상대로 한의학 강의를 했었다. 1960년 동양의대 교수가 되고 난 후에도 야간 시간대에 한의원 2층에서 강의를 계속했다. 동양의대에서는 주로 內經과 運氣學을 강의했다.

선생은 대한한의사협회 일에는 별로 간여한 바가 없지만 대한한의학회 일에는 정성을 쏟았다. 한의학회지 기고에도 열심이었고 한의학회 이사와 교육부장도 맡았다.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한의사 중에는 설태훈(서울 동광한의원) 원장과 송융섭(서울태화한의원) 원장, 문준전 전 경희대 및 동국대 한의과대학 학장(현 서울 문한의원 원장), 오세정(서울 세정한의원)원장 등이 있다. 특히 문준전 전 학장은 한동석 선생을 초빙할 당시의 동양의대 학년대표였으며 선생을 모셔오기 위해 직접 한동석한의원으로 방문하였고 이후 학교와 한의원에서 수학하였다.

운기에 정통한 분이라서 그런지 선생은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生日, 生時에 닥칠 것을 미리부터 내다보았다. 그 운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에 임박하여 자구책으로 자신의 생일을 넘기고 오겠노라고 계룡산으로 내려가는 시도를 하였으나 지병인 고혈압, 비증, 후두암 등으로 투병하다 뇌졸중이 악화되어 결국 자신의 예견대로 1968년 자신의 생일인 음력 6월 5일 생시인 寅時를 끝내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향년 58세였다.

선생은 서울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된 것은 선생을 천주교에 입교시킨 김동열(작고. 70년대 서대문에서 복자한의원 운영)씨의 주선에 힘입은 것이다. 그 후 1년 뒤 제자들이 선생의 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비석의 뒷면에는 선생의 일생을 요약한 글이 적혀 있다.

“出於關北, 遊於漢陽, 守心養性, 尊德樂道, 醫通百家, 術濟萬人, 廣設絳帳, 大育英材, 乃承其業, 以頌其德, 謹表石銘, 永世不忘”

실제로 한의학 관과 임상은 물론이고 한의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한동석 선생은 많은 한의인들 곁에 영원히 살아 있다.

(이상의 내용은 대전대 한의대 權景仁씨가 윤창렬 교수의 지도를 받아 쓴 2001년에 쓴 석사학위논문을 요약 발췌한 글이다.)

정리=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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