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7] 斗庵 韓東錫 선생(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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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7] 斗庵 韓東錫 선생(上)
  • 승인 2003.04.1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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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 運氣篇 一萬讀 위업 달성

매사에 熱中, 학문·임상에 빈틈 없어


斗庵 韓東錫 선생은 ‘宇宙變化의 原理’와 ‘東醫壽世保元註釋’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대표적 저서인 ‘宇宙變化의 原理’는 40년이 지나도록 동양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꾸준히 읽혀지고 있는데 비해 그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가 어떻게 공부하고, 우주론을 터득했는지, 그리고 임상에서 치료와 환자는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는 것 자체로 전통의학의 맥이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되새겨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편집자주〉


이제마 二傳弟子 김홍제 선생 영향

선생의 본관은 청주이며 본명은 國欽으로 월남후에 東錫으로 개명했다. 호는 斗庵 혹은 東庵이다. 1911년 7월 3일 함경남도 함주군 하조양면(오늘날 함남 영광군 용동리 근방)에서 청주한씨 예빈윤공파 22세손으로 부친 希春과 모친 李氏 사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20대 후반까지는 장사를 하였다. 그러다 부인이 폐병을 앓아 동무 이제마 선생의 2傳제자 김홍제 선생(북청의 양경호 선생에게 배웠다는 증언도 있다)을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어 부인의 사망과 함께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나라의 근대사가 그렇듯이 선생의 일생에도 곡절이 많았다. 해방 이후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의 함경남도 조직국장을 역임하였다. 6.25 동란 중에는 국군 반격시절 함흥 민선 경찰국장을 2∼3개월 지내다 월남하였다. 그 과정에서 부인과의 이혼, 사별, 월남, 출가 등으로 5번의 결혼을 치뤄 복잡한 개인사를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1953년에 부산 영도에서 제2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응시하여 면허를 취득하고 그 곳에서 정식으로 仁溪한의원을 개원하다 서울로 이사왔다.

선생에게 한의학을 처음 가르쳐준 사람은 김홍제 선생이지만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1953년 ‘易學原論’의 저자인 韓長庚 선생에게 2개월간 주역을 배우고서부터다. 한장경 선생과는 북한에서 정치생활을 하여 이미 아는 사이였다. 선생은 이때부터 계룡산 국사봉에 강학의 장소를 마련하고 한 달에 3∼4회 방문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宇宙變化의 原理’에 나오는 正易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이때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의 학문이 점차 무르익을 무렵에 동양의약대학 폐쇄령이 내려져 몇몇 교수들이 학교를 떠나자 교수로 추천되어 윤길영, 안병국 교수와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동양의약대학 제2대 학장으로 양방의사인 이종규 박사가 취임하자 그 날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학교를 나오게 된다. 한의과대학에 양의사가 학장을 하는 것은 한의사를 모독하는 행위라는 게 사직의 이유였다. 그만큼 그는 한의학에 대한 자긍심이 컸다.


부산서 한의원 차려

6.25가 발발하면서 부산에 피난 가 한약방을 하면서 선생은 독학을 했지만 자기보다 나은 이가 있으면 찾아가든지 아니면 모셔와 자신의 집에 기거시키면서 주위의 한의사들을 모아 같이 배웠다.

그러던 중 황제내경 運氣篇을 만나 이것을 萬讀하고 내경 전체를 千讀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했다. 조카인 한봉흠 고려대 교수는 황제내경 운기편을 만독했다고 증언했고, 부인 이옥자 씨는 약성가일 수 있다고 증언해 어느 것을 만독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아 신빙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선생의 초인적인 집중력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시사해주는 일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선생은 아침, 저녁을 불문하고 책을 보았고 길을 걸을 때나 자리에 앉아 있을 때나 항상 무언가를 외우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자신은 한의사이니 이런 것은 항상 입에 달고 다녀야 한다며 내경 운기편 외에도 본초의 약성가를 쉴새없이 외웠다고 한다.

한봉흠 교수는 선생과의 대화내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三千讀을 하고 나면 뭔가 알게 될 것 같아 공부했었는데 三千讀을 하고 났지만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부터 오대산, 계룡산 등지로 공부를 하러 가기 시작했고, 주역공부를 배우기 위해 사람을 찾아 헤맨 것도 같다. 그렇게 六千讀을 하고 나니 구름 밑에 뭔가가 있는 것 같으니, 三千讀을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다시 三千讀을 더 하였다. 그런데도 트이질 않아 ‘만독을 하면 뭔가 통할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기어이 만독을 달성했다.”


초인적인 집중력

선생의 집중력을 실로 대단해서 의문점이 생기면 추호도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없을 때에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철저함을 보였다. 학문뿐만 아니라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철두철미하게 임하여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세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간명하면서도 철저한 치료를 행하고 있었다. 제자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사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주:이상의 내용은 대전대 한의대 權景仁씨가 윤창렬 교수의 지도를 받아 쓴 석사학위논문을 요약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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