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특집] 무위당선생, 그의 학문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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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특집] 무위당선생, 그의 학문과 인생
  • 승인 2003.04.1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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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소문학 실천, 전파에 헌신

드러내지 않고 정통한의학 기반 다져

무위당 이원세 선생은 1907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17세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四書三經을 마쳤다. 집안이 빈한하여 20세까지는 의학을 위주로 배우면서 생활의 방편을 모색했는데 수업료를 낼 수 없어 이리저리 스승을 찾던 중 무위당이 의탁한 집에 어느날 당대의 대학자 석곡 이규준 선생이 방문했다.

무위당은 심부름을 하며 드나들면서 먼발치에서나마 석곡 선생의 학문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았다. 석곡 선생도 무위당의 천품을 알아보고 ‘언제 석재 서병오의 집으로 오라’고 말하고 떠났다.

한달에 두어번 석재의 집으로 찾아온 석곡이 무위당을 부르면 평소 궁금했던 것을 한두마디 여쭙는 것이 공부의 전부였다. 그러나 무위당은 비상한 결심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며 스승의 학맥을 이었다.

6년7개월간 석재의 문하생 생활을 마치고 고향 청도로 돌아온 20대 후반의 무위당은 한약방을 열어 이치적으로 병을 다스려 1년만에 명의로 소문이 났다.

해방후 대구에서 한의원을 연 무위당은 하루 10여명의 환자만 보는 대신 환자와 인생상담을 하고 세밀한 처방으로 난치병을 완치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결과 많은 사람들이 문하를 드나들었다. 그러나 제자 양성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제자들이 손에 잡히는 처방을 원했을 뿐 원론을 배우려는 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부산행은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1985년 평소 각별한 정분으로 주위에서 부러워했던 부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대구 한의원 문을 닫고 아들이 사는 부산으로 내려간 것이다. 이때 부산에서 활동중이던 10여명의 젊은 한의사들이 무위당 선생의 명성을 접하고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이론과 임상이 일치하였던 무위당 선생은 스승으로부터 배운 소문학을 실천하고 널리 펴는 데 일생을 받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스승의 저작인 소문대요와 의감중마를 가르치는 외에도 스승의 처방을 전국에서 모아 편집한 ‘신방신편’과, 의감중마에 고금의 처방을 편집해 넣은 ‘백병총괄 방약부편’을 저술해 소문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선생은 ‘몸의 주인은 마음’이라는 철학을 깊이 체득, 제자와 환자들을 감동시켰다. ‘스스로 수양하고 편해지지 않는 한 명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소문학의 대요라고 보아 늘 그렇게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석곡의 가르침이 오늘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아슬아슬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다음과 같은 소문학회 회원의 회고에서 그 순간들을 보지 않아도 파
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무위당 선생님이 석곡 선생님을 만난 것도 인연이요, 선생님이 무병장수하신
것도 인연이다. 제자들이 찾아갔을 때 벌써 여든을 넘긴 선생님이 정신이 또렷하고 매일같이 찾아가도 강의준비를 꼼꼼히 하실 정도로 건강하셨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통 한의학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되었다.”

석곡과 무위당으로 이어지는 扶陽抑陰의 가르침은 소문TV를 타고 전해지고 있다. 10일마다 5편의 한의학 강의와 2편의 생활한의학 강좌가 방송되고 있다.

마음으로 병을 다스린 心醫 무위당 선생. 그가 전파한 치병의 대의는 소문학회 회원들이 잇고 있다.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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