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적 사고, 그것만이 진정한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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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적 사고, 그것만이 진정한 무기
  • 승인 2010.04.0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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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박순환 역사편찬위원장
한의학적 사고, 그것만이 진정한 무기

식민사관 벗어나야 한의 역사 정립 가능

대담= 박순환 역사편찬위원장

진행= 강근주 편집국장

“대한제국이 발표한 내부령 27호 의사규칙에 보면 한의학의 정체성이 분명히 나와 있다. 그런데 이를 일제가 말살했다”

역사는 권력자들이 만든다. 그러나 역사를 가슴 속에, 머릿 속에 이고 사는 건 민중이다. 알바르 까뮈는 역사의식을 이처럼 간파했다. 역사의식은 당대를 넘어 미래를 쥐락펴락한다. 오죽 하면 민중의 역사의식을 잡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미셀 푸코는 설파했겠는가.

실제로 우리 사회는 광복 65년을 맞은 지금도 여전히 식민사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다. 하물며 한의 역사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일제가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의사를 의생으로 격하시키고 한의학을 민간요법 정도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그 여파는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정책 당국은 물론 한의계조차 야금야금 패배의식으로 물들이는 중이다. 한의학적 사고, 하루 빨리 되살릴 필요가 있다. 법고창신, 온고지신이 한번쯤 해보는 빈말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박순환 전 대한한의사협회史 역사편찬위원장은 한의학적 사고를 위원회 활동의 키워드로 삼았다. 올해 1월 공식활동을 마감한 그를 만났다. 암과 투병하면서도 한의 역사 정립에 기꺼이 열정을 불사르고 분투한 그의 모습에 경의를 표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가 절로 읊조려진다. 

-무거운 짐을 이제 덜었다. 소회가 남다를 듯싶다.
“위원들의 내공이 높아 작업이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됐다. 대한한의사협회의 설립 기원을 1898년으로 잡는 데는 이견이 없었으나 일제 강점기 역사를 놓고 시각이 약간씩 달랐다. 여하튼 일곱 번의 회의와 세 번의 세미나가 무난히 잘 끝났다.”

-활동 방향과 원칙을 어디에 뒀나.
“한의학적 사고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너무 보수적이란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한의학적 사고가 없으면 대한제국 또는 일제 강점기 역사, 의료 일원화 문제를 이해 못한다. 지금 사회 일각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근대화 과정으로 평가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이는 결과만 평가하는 오류다. 역사성과 민족성 말살을 간과해선 안된다. 마찬가지로 일제의 한의학 말살정책을 의료정책 근대화로 보면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근대 한의 역사는 억압 그 자체로 보인다.
“역사와 역사 전개과정은 다르다. 문명과 문명의 충돌, 즉 도전과 응전이 전개과정이다. 여기엔 심판이 필요한데, 그 심판은 공정해야 한다. 헌데 일제는 서양문물과 동양문물의 경쟁에서 일방적으로 한의사들을 억압했다. 그 여진이 남아, 아직도 한의학적 사고방식을 배척하려고 드는 심판들이 존재하고 있다. 한의계로선 참 불행한 일이다.”

-그동안 3번의 세미나와 7번의 회의를 세미나를 열었다. 결실이 설령 지금 당장 확인되지 않을지라도 언젠가 다른 결실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가장 큰 보람은 무엇인가.
“1898년 대한의사통합소를 한의협의 설립 기원으로 세운 것이다. 大韓醫士總合所는 대한제국의 의학 전문가들이 모여 결성한 醫會다. 이는 기원을 몇십 년 앞당겼다는 점을 넘어 한의 역사와 독립운동사의 접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한의학 자부심을 회복했다는 의미가 크다. 이런 자랑스런 과거를 미래와 연결하는 건 학자들과 협회의 몫이다.”

-자존심 회복과 연결되니, 한의계 반응이 뜨거웠겠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문 듯하다. 한의학적 마인드가 없는 의사들이 많아서인지, 일간지 홍보도 잘 안됐다.” 

“일제는 동서양 문물의 경쟁에서 한의사들을 억압했다. 아직도 한의학적 사고방식을 배척하려고 드는 심판들이 존재한다”

-역사 편찬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의계 전체가 협력해야 한다. 도움은 많이 받았나.
“역사 편찬이 뭐가 필요하냐, 동네 한의원 살리기나 침수가를 조금이라도 더 올리는 게 낫지 하는 말도 있었지만 많은 분이 소장 자료를 주시는 등 열성을 보였다. 학교에서 연구하는 의사학 전공자들과 재야의 의사학자들이 큰 도움을 줬다.”

-특별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나.
“한대희 원장, 황연규 원장, 임일규 원장, 이금주 전 협회장 등 많은 분이 떠오르지만 이 지면을 통해선 협회 직원들로 구성된 실행위원회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동안 협회는 회원들, 구성원들의 인적사항, 면허사항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보 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를 실행위원들이 근 1년간 자기 시간을 쏟아 완전히 집대성했다. 이제는 한의사 족보를 보기 위해 보건복지부를 찾아가거나 조선총독부 관보를 뒤질 필요도 없이 협회로 가면 된다. 상당히 칭찬할 일이다.”

-원로들이 소천하시기 전에 경험사를 녹취라도 해야 하지 않나. 이런 자료는 나중에 정사를 정리하는데 토
대가 될텐데.
“맞다. 그 분의 증언이 아니라면 절대 증명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기를 쓰고 찾아가 기록하고 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그 분들의 기억력을 보충할만한 자료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사진이나 증서 같은 것이 보관돼 있으면 좋을텐데, 거의 없다.”

-기존 한의협 40년사를 수정했다고 들었다. 수정 보완된 부분은 무엇인가.
“40년사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책이지만 시도지부에서 한의사제도나 법률 등을 잘못 알고 올렸던 것, 이름 자체가 틀린 것 등을 사료와 증언 등을 통해 고쳤다. 한의학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역사적 순서 역시 새롭게 편집했다. 연표도 좀 더 보강했다. 협회 정관의 변천사는 좀 더 상세히 담았다.”

-1957년 한의사 면허번호에는 1번이 없다. 행정 착오인가.
“관보 자체에 1번이 없다. 당시 기록자는 돌아가셔, 관보 담당 공무원을 찾아 ‘왜 1번이 빠졌냐’고 묻자 그 분은 ‘비행기 1등석이나 새마을호 1등석을 비워 놓던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로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의사를 잘 아는 담당 공무원이 상징적인 인물을 기다리며 1번 자리를 아예 비워놓았다는 추리도 가능하다.”

“기원을 앞당겼다는 점을 넘어 한의 역사와 독립운동사의 접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자부심을 회복했다는 의미가 크다”

-침구사제도는 이미 사라졌다. 그런데도 뜸사랑 등은 침구사제 부활을 노리며 끈질기고 집요하게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침구사 제도는 일제의 잔재다. 일제는 1913년 의생제를 도입한 뒤 1914년 10월 안마사, 침사, 구사 영업면허를 부여했다. 이들은 명치유신 때 황한의학을 없애면서 만들어진 제도다. 1963년 의료법을 개정하며 폐지됐다. 다만 기존 면허자 80여명에게 기득권을 인정했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구당 김남수다. 결국 한의학 말살정책 일환으로 이식된 일제 제도가 계속 한의학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를 한의학이 국민의학으로 전환하는 시점으로 잡았다. 근거가 무엇인가.
“1990년대는 국민의 호응이 상당히 높던 시기다. 약자라서가 아니라 효용성 측면에서 호응이 컸다. 경실련 조사에서도 한의학 지지도가 80% 이상을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국가가 건강검진을 양방병원에 가서 받으라 했고, 의사들이 한약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니까 국민은 한의학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한방주치의가 현 정권에서는 사라졌다. 배경이 궁금하다.

“한의학적 마인드가 없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신종플루 등 전염병 대책이나 출산 장려, 소아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육아 발달 건강관리 등 여러 정책에서 한방을 배제하고 있다. 한의학 배제는 일제로까지 이어진다. 한의계 고난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정책 입안자들에게 한의학적 사고를 심는 건 쉽지 않다. 한의계 활동에 만족하나.
“노력은 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상대방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더 땀을 흘려야 한다. 최환영 협회장 시절 ICOM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큰 이슈가 됐다. 협회는 당시 대통령 참모들을 설득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열린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실행위원들 덕분에 이제는 한의사 족보를 보기 위해 보건복지부를 찾아가거나 조선총독부 관보를 뒤질 필요가 없다”

-역사는 인물과 사건의 교직이다. 대국민 홍보를 위해서라도 대중성을 지닌 한의사 발굴이 필요하다. 대중성과 전문성을 지닌 근현대 인물을 많이 발굴했나.
“주력한 건 아니지만 무관심한 부분도 아니다. 한의계 스타들을 꾸준히 발굴할 필요가 있다. 한의계처럼 단절이 심한 역사를 일으켜 세울 때 인물은, 스타들의 존재는 절실하다. 그 인물 발굴을 재야학자들이 해주고 있다. 언론들은 이런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

-위원회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예산 지원은 충분했나.
“김현수 협회장이 애정을 보였지만 예산 확보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회장 추천으로 들어온 위원들에게는 예산 확보 임무를 줬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사비를 많이 썼다. 예산이 충분치 않아도 위원 모두 불만은 없었다.”

-본래 계획에 차질이 없었나.
“보존판은 책자로 만들어 학교, 공공단체, 언론기관에 배포하려고 했다. 회원들에게는 CD를 돌릴 생각이었다. 헌데 올해 예산 확보가 명시적으로 안됐다. 너무 아쉬운 대목이다.”

-역사편찬위원회가 또 꾸려져야 하지 않겠나. 다음 위원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없나.
“수집한 한의 자료들이 맥을 이어가고 숨을 쉬게 해주면 좋겠다. 이는 편찬기술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실무의 연속성을 위해 협회 사무국 직원 2명을 편찬위원회 간사로 위촉했는데, 이런 시스템을 잘 활용했으면 싶다.”

“일제는 1913년 의생제를 도입한 뒤 1914년 10월 안마사, 침사, 구사 영업면허를 부여했다. 결국 한의학 말살정책이 계속 한의학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협회사는 근현대 한의 역사나 다름없다.
“지나간 사건의 나열이 역사인데 이번에는 사건의 전개과정을 좀 더 중시했다. 한의 주체가 좋은 생각을 갖고도 심판의 사고방식에 의해 왜곡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바탕이 왜곡되지 않고 계승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의학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나돈다.
“1900년 1월 대한제국이 발표한 내부령 27호 의사규칙에 보면 한의학의 정체성이 분명히 나와 있다. 비록 면허증을 발급하지는 않았지만 법으로 권리와 의무를 표시했다. 그런데 이를 일제가 말살하고 안마사, 침사, 구사제도를 강제 이식시키면서 왜곡시켰다. 정체성은 구성원들이 만들기도 하지만 법제가 제일 중요하다.”

-한의협 기능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지금처럼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한의협 주요 기능이 무엇이라 보나.
“독립 한의학법 제정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흥망은 구성원 본인의 문제다. 성쇠는 제도의 문제이니 지도자, 즉 협회장은 제도 개선에 힘써야 한다.”

정리=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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