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6) | 잃어버린 우리역사, 발해시대의 의학
상태바
Story & History(6) | 잃어버린 우리역사, 발해시대의 의학
  • 승인 2009.12.04 13: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웅석

차웅석

mjmedi@http://


“발해의 침구기술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광활한 영토에 걸맞은 다양한 약재 생산과 처방기술은 당시 동아시아의학의 첨단을 달렸다”

중국의 포털사이트에서 발해(渤海)를 검색하면 엄청난 양의 검색결과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잃어버린 역사,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중국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사이의 바다를 지금도 발해(중국어 ‘보하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30년 이후 698년에 고구려의 유민과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지금의 요동지역에 세운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지만, 한반도 북쪽과 요동지역을 모두 통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발해와 묶어서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통일신라의 것만큼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발해가 926년에 거란족에 의해 멸망한 이후 더 이상 요동지역을 우리문화의 한 영역으로 아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유산조차 중국의 동북공정 속에서 중국화되는 것을 참고 지켜봐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발해가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존속했다면, 분명히 그들만의 의학적인 것이 있어야 하겠지만, 소략한 발해의 역사기록 만큼이나 의학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그러나 최근에 한 연구자(이정록, 발해의학에 대한 연구, 경희대석사, 2007)가 희미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료들을 뒤져 발해의학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발해에는 단오날 쑥떡을 만들어 먹는 풍속이 있었고, 온돌로 대표되는 주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종기를 치료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요동지역의 토산 약재에 대한 노하우도 축적하고 있었고, 중국에 없는 많은 양의 중국의학 문헌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의료제도와 의학교육은 고구려의 것을 기본으로 삼고, 당나라와 신라의 제도를 참고하였으며, 고려의 의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에서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과 같은 종기 전문 치료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교육하게 된 것은 순전히 발해의 영향이라고 연구자는 지적하고 있다.

침구학에 있어서는 高麗鐵로 대표되는 양질의 재료로 우수한 침기구를 생산했으며, 그에 걸맞은 침구의학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발해의 침구기술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본초학 분야에서는 <본초경집주>나 <신수본초>와 같은 중국의 최신 본초학서도 들여와 풍부한 본초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문헌에 보이는 녹용, 녹각, 상기생, 상지, 상백피, 백강잠, 저담, 저부, 인삼, 우황, 송자, 황명교, 백부자, 사향, 밀 등 다양한 약재의 사용기록이 있다. 더욱이 발해는 한반도 북쪽에서 요동의 전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다양한 약재 생산, 그리고 그 약재의 운용과 연결된 처방기술 등은 당시 동아시아의학의 첨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발해의 의학은 발해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하면서 상당 부분 고려의학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이 그 연구자의 결론이다.

최근 한국의학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고려시대 의학에 관한 내용이 조금씩 베일을 벗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그 베일이 다 벗어지고 나면 그 고려시대 의학의 저편에는 요동 일대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쌓아온 의학적인 노하우가 강하게 배어있다는 점이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